레비나스의 철학노트(3)

<carnet 2>
1942, 라발
- 글이 잘 안써지거나 우울할 때 그의 노트들을 읽는다. 마음의 위로가 된다. 여기 옮긴 번역은 노트 2권의 반 정도의 분량이다. 레비나스는 한 인터뷰에서 18살에 처음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라신느을 읽으면서 불어를 공부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 당시 나는 열심히 스트라스부르크와 내가 살던 곳을 일주일에 한번씩 기차로 오가던 때였다.) 이 노트에 라신느에 대한 긴 노트가 적혀있다. 또한 아리오스트, 에드가 포우에 대한 언급들도 있다.
<p. 1> 우울한, 끝나지 않는, 어두운 나의 꿈은 망각의 강(레테)이 아닌 어떤 짓누르는 강물에 붙잡혀있다.
- 이런 꿈은 어떤 꿈일까를 상상해 본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은 출구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되돌아옴도 출구도 없는 연루로부터, 절대적으로 부여된 그것의 존재함의 사실로부터, 그것의 감산되어질 수 없는 사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페드르(Jean Racine의 Phèdre)의 4막을 보라. 실재는 그녀의 부모들로 채워져 있다. 죽음이 그녀를 그녀의 아버지 미노스에게 이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다른 것처럼 존재의 한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예외적인 것을 약속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최상의 가능성, 초월성의 약속이다. <p. 2> 어떤 점에서 예외적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유한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적 비극의 자유의 상실.
- 하이데거가 이해한 칸트의 유한성과 다른 칸트의 유한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레비나스가 취하는 유한성, 유한 안에 유한이 감당할 수 없는 무한, 심연의 발견, 이 불편함이 깨우는 진리. 비극이 아닌, 그리스적 비극도, 존재의 비극도 아닌, 존재와 다르게. 감성의 유한성.
앞서 죽음이 <출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미래의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2부의 <사느냐 죽느냐>의 독백은 너무 직접적이고 이미지적인 의미산출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의 영역에서 아버지를 발견하는 페드르의 절망에서처럼. 이것은 <진 놀이>라는 것을 말한다. 죽음이 출구가 아닌 것은 완성의 질서 안에서 - <모든 것이 소진되었다> - 이다. 완성의 질서를 밝히는 것 - 그것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 나의 철학의 철학적 기획이다. 현상의 주관적 객관적 기획에서 그것의 완성의 기획으로의 이행. 이러 저러한 현상에서 완성되는 것은 무엇인가? 의도를 탐구하는 현상학이 아닌 <p. 3> 혹은 현상의 의미산출이 아닌 것. 후설의 <<Wohin hier hinausgewollr ist>>(Où veut-elle en venir, 어디서부터 의식은 도래하기를 원하는가?). 정신의 정신분석. 그런데 다른 것. 무엇?
페드르의 몇몇 중요한 구절들
“나는 조상으로 신들의 아버지와 주인을 가진다;
하늘, 모든 우주가 조상들로 가득차 있다.
어디에 숨을 것인가? 지옥의 밤으로 도망칠 것인가.
그런데 내가 뭘 지껄이고 있는가? 나의 아버지는 유골단지에 담겨있지 않은가...”
그리고 요나스는 어딘가에 숨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고한 존재의 시선을 앞서는 것이다:
“그들의 한숨으로 가득찬 하늘은 이 무고를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후회 없이 <p. 4>그들의 사랑을 쫓고 있다;
하늘은 매일 그들은 위해 맑고 조용하게 자신을 드리운다.
그런데 최악의 슬픔으로 가득찬 나
나는 낮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고, 빛으로부터 도망치고...”
그리고:
“...그들은 항상 서로 사랑할 것이다.
내가 말을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 죽음의 사유!
그들은 격발한 연인의 분노를 이긴다.
그들을 떼어놓을 추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떠나지 않는 수많은 맹세들을 한다...”
- 조상성, 유령성, 맑스의 유령들. 미래의 타자. 죽음이 아닌 죽은자에 대한 사유, 하나 이상의 것. 통시성, 비극이 아닌 존재와 다르기... 이미 레비나스의 사유 안에서 그의 라신느 읽기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즐거운 발견.
<p. 5> 범죄와 무고 - 는 여기서 모든 도덕적 사실들보다 더 깊게 체험된다. 아니 차라리 도덕 그 자체가 존재론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페드르의 범죄는 그녀가 감출 수 없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녀는 지워질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감당한다. 그리고 죽음은 그녀에게 출구가 아니다. 비극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
아리오스트(Arioste 1474-1533*)의 분노한 롤랑(Roland furieux)에는 브라다만트 그리고 로저에게는 멜리스와 예언가 메을랑에 의해 예언된 미래의 영광과 미래에 대한 확실성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확실성과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등장인물들의 일련의 모험들에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p. 6> 롤랑 그 자신이, 스스로 허약하지 않다고 믿음에도, 마치 용기가 죽음 앞에서 죽음에 대한 태도가 아닌 것처럼 진정한 용기와 고귀함을 전개했듯이 말이다. 현재의 지상권. 그가 유일하게 가진 것.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위에서 떠도는 확실성과의 관계에서 완성이 가지는 어떤 이상의 것. 미리 정해진 운명의 문제는 자유의 문제를 고스란히 남겨 놓는다; 실제적으로 체험된 운명은 미리 써 진 운명 이상의 어떤 것 <이다>. 바로 이것에 의해 비극은 가능하다; 우리와 되돌릴 수 없는 운명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불행만이 아니라, 우리와 되돌릴 수 있는 운명 사이에서 오는 불행. 비극은 이 순간 안에 존재한다. <p. 7>정당한 투쟁을 죽이는 무기들에 대한 롤랑의 저주들은 자신이 허약하지 않다고 믿는 롤랑의 용기의 본성과 반대되지 않는가?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의 있는 바의 것으로서의 가치와 우리가 가진 것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분노한 롤랑』에는 일종의 신체의 개별성이 있다. 로저의 외양을 취하는 아트랑은 로저가 아니다; 젊은 여자의 외양을 취하는 알신느는 젊은 여자가 아니다. 마술은 세계의 구성의 부분을 이룬다. 실재는 마술 - 환상과의 대립 안에서만 이해된다.
생각해야 할 것: 안젤리크의 반지. 마술에 저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 부정적인 매혹.
<p. 8>아트랑의 간계는 텅빈 성 안에서 기사들에게 값 비싼 물건들의 환상을 제공하면서 기사들을 성 안에 잡아둔다 - 그리고 그들은 이 절대로 그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 이 성을 잘대로 떠나지 못할 것이다. 이 이미지가 제시하는 문학의 아름다움. 철로 지워진 성보다 더 강한 매혹.
『분노한 롤랑』에서 마술 - 은 진짜로 마술이 아니다. 그것은 환상의 힘이다. 또한 안젤리트의 반지와 로지스틸이 아스토리프에게 주는 책은 이 마력을 제거하는 것을 허락한다 - 그것은 이성이다.
삶에 대한 뒤틀린(악으로 기우는) 사랑(L'amour pervers de la vie). 고통에 대한 잔인한 쾌락. 이것은 신의 현전 그 자체이다. 삶에 대한 뒤틀린 사랑 - 신에 대한 사랑. <p. 9> 조화로운 우주의 광경에 의해 보답하는 신에 대한 - 직접적인 사랑의 범신론 위의 선.
삶에 대한 뒤틀린 사랑에서 - 고통은 의무의 완성에서 느끼는 만족과는 혹은 금욕주의의 순수하게 부정적인 단념과는 혹은 보답에 대한 예측과는 다른 맛을 가진다. 이것은 다음의 공식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 <<사는 것에의 관심>>, <<삶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는 것이다>>. 고통의 행복, 고통 그 자체 안에서, 선택된 고통 안에서. 이러한 고통이 여는 전망들은 거기에 따르는 보상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이 지배하는 삶과 시간과 행복한 실수(felix culpa)의 자리로서의 고통의 상황 그 자체로부터 흘러나온다.
<p. 10> 인간의 동물성. 심리 생리적인 연구에서가 아니고, 인간의 지각에서의 연구. 느끼기. 마치 소가 그들의 뒷발을 밟는 것처럼. (...) 내가 어떤 취기에 빠져있는지 자기도 모르게 술독에 빠진 인간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느끼기. 이 토대 위에 취기에 대한 모든 주제, 동물성이 엮인다. <p. 11>모든 취기는 그것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가진다. 이것은 모든 지적인 주장 뒤에는 이 동물적인 측면이 자리하는 것처럼 모든 지적인 주장들 안에서 나타난다 - 티눈, 습관, 색깔 - 것, 것, 것, 자신의 물질성 안에서 나를 아주 불편하게 하는 것.
정 바베(J. Barbey)의 『범죄의 행복』. 그들은 완벽하게 행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 범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p. 12> 체계는 스스로를 조직한다: <나>는 현재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 이 나에 의해서 사라지는 현재는 기억 안에서 보다 더 잘 살아 남을 수가 있다(기억은 나를 전제한다). 나의 이러한 측면: 자기(le soi)에 대한 나(le moi)의 현전. - 그런데 나도 규정된 것의 규정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 이것으로 인해 현재는 고쳐질 수 있으며 - 이것으로 인해 희망이, 현재에 대한 희망이 있을 수 있다. 이로부터 구원의 변증법 - 자신의 내밀성으로부터 풀려 나오는 나의 변증법. 타인과의 내밀성. <<타인과의 융합>>이 아닌 - 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 개의 나. 이 이중성은 정확히 육체적 욕망에서 기술된다 -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하나의 욕망에 대한 타자로 다루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사회의 기원으로서의 성. 여기에는 성적인 <<내밀성>>이 있기 때문이며, 개인들의 합 이상인 사회의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p. 13> 애무와 신체에 의한 완성은 그렇게 나타난다. 사랑에 의해서 죽음의 문제를 밝힐 것. <<사랑-죽음>>이라는 새로운 짝에 던져진 빛. 피와 죽음과 성욕으로부터. 이상과 완성의 개념이 정립되는 것도 바로 이 상호개인적인 기획 위에서이다. <<신의 정면에서>> 살기. 완성은 - 드라마를 가정한다 - 두 인간을 가정한다. - 이원적인 관계와 시간의 드라마는 사회적인 이원성, 성관계로부터 밝혀진다. 선 - 존재를 넘어선다.
내가 성적 관계를 사회적 관계에 바닥에 놓을 때 - 나는 모든 체계의 바닥을 놓는 것이 아니다: 성적 쾌락 혹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적인 리비도는 <<쾌락의 탐구>>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적 사랑이라는 인간 사이의 이 특수한 관계에서 드러나는 어떤 관계의 질서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드가 포우. 『두 개의 단편』이라고 제목이 붙은 것. 한 단편, <잃어버린 고래, 검은 숲 안에도 밖에도 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은 것. (...) 베큐르 출판사의 804-805쪽의 이야기. “이것은 따라서, 나의 정신을 명상하고 있었으며, 이 어둠은 만져지고 숨 막히는 감정으로 짓이겨진다 - 이것 - 이것 - 이것 - 진정으로 죽음이다. 이것은 죽음이다 - 끔직한 죽음 - 성스러운 죽음, 이것은 레규루스가 따른 죽음이다 - 그리고 또한 <p. 15> 세네크가 따른 죽음이다. 그것은 또한 나 역시 항상 - 항상 - 머무는 것이며, 항상 - 머무는 것이다. 이성은 광기이다, 철학은 거짓말이다. 누구도 나의 감정, 나의 이 끔찍한 - 나의 절망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추론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철학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바보같은 짓을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잘 본다. 이것 - 이것 - 이것 - 만이 유일한 영원성이다! - 뭔 영원성! - 이 거대한 - 이 끔찍한 공허의 연장 안에 존재함 - 비정상적인, 무의의한, 모호한 - 움직임 없이 그런데 움직이고자 하는 욕망만이 있는 - 힘 없이, 그런데 힘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이 내용들보다 이 상황의 리듬이 주는 반복에 주의할 것, 이 상황은 리듬으로 이뤄질 뿐이다. <<일 이 아, L'il y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