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철학노트(1) - 욕구로서의 대자
총 7권으로 나올 것이라고 한다. 1권에서 3권까지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글들이고 4권부터 6권까지는 출판된 책들을 다시 묶은 것이고 7권은 인터뷰들만 모아 놓은 것이다. 장-릭 마리옹의 지도하에 많은 학자들이 수고를 했다. 장릭 마리옹의 출판 서문의 한 구절을 옮겨 놓는다.
"우리는 진정한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전집의 필요성와 그것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감을 동시에 가진다. 우리가 발견된 거대한 양의 출판되지 않은 글들의 발견은 이러한 필요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 전집 출판에 참여한 모든 학자들에게 이 유고들은 거대한 작업장이었다. 이제 그의 사유는 자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을 것이다." (장-릭 마리옹)
읽다가 생각나는 대로 옮겨 놓으려고 한다. 하나의 책을 읽는 것과 달리 노트들은 한 철학자의 생각의 단편들, 그 여정, 그 흔적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말끔히 손봐진 하나의 책하고는 다른 맛이 있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공들인 학자들의 수고가 눈에 보이는 책이다.
철학노트 (레비나스 전집 I)
*편집자들이 발견한 막대한 양의 마뉴스크리는 종이 조각들의 묶음으로 엮여 있는 것들이거나, A4용지에 쓰여진 것이거나, 이미 사용된 종이의 뒷면에 적혀있는 것들이었다. 그 종이들에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일단의 것들은 날짜가 적힌 타자로 쳐진 것들이다.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것은 다만 <시간과 타자>(1948)와 <전체성과 무한>(1961) 사이에, 혹은 그 전후로 쓰여진 것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편집자들은 발견한 순서대로, 주제별로 나눠서 실었다.
<2>
<f*.1> 욕구로서의 대자(le "pour soi" du besoin)(pp. 243-248)(f*라고 표시된 것은 발견한 종이에 편집자들이 붙인 번호이다)
혼돈의 끝 = 빛과 어둠의 분리 = 나, 자아의 출현. 향유 = 자아의 삶. 향유는 욕구의 만족이며 -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 대자로 존재하기. 여기서 말하는 대자존재는 관념론의 대자존재가 아니다: 주체에 의한 주체의 표상. 욕구의 대자는 표상이 아니며, 데카르트 이래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의식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유한한 대상이 참조하는 무한에 대한 의식이다. 욕구는 무한한 지평들 없이 존재하는 대자이다. 욕구의 대자는 하이데거의 자신의 고유한 실존의 대해서 존재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욕구는 욕구의 존재의 실존을 지향하지 않고, 그 존재의 만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욕구는 우리의 학 - 생물학 혹은 경제학 - 에서 실존의 수단으로 나타나는 것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지향된다. 욕구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에게 하나의 목적, 다시 말해 자기 이외에 다른 것에 더 이상 보내지지 않는 것을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 생물학적인 함축으로부터, 다시 말해 생의 본능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는 것이다. 욕구의 모든 목적은 궁극적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지 않는다. 본능에 대립한 의식, 그것은 한계와 끝(un terme*)을 가지는 것이다. (*역자주: 라틴어의 terminus는 borne한계를 지시한다. 동시에 이 말은 시간적인 종말의 의미가 아닌 시작과 그 완성의 의미로서의 끝을 의미한다. 그로부터 이 말은 분리된 한 항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계지워진 용어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무한에 대한 유한의 의미에서 terme이라는 의미를 사용한다. 위에 레비나스가 밑줄 친 "욕구는 무한한 지평들 없이 존재하는 대자이다"라는 것은 여기서 "한계와 끝을 가진다"라고 다시 말해진다. 이 노트들은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철학적 노트들이다. 이 한계와 끝을 가진 욕구에 대한 한계와 끝이 없는 무한의 욕망déisir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욕구의 대자는 따라서 우리가 "각자 알아서(chacun pour soi)"라고 말할 때에 에고이스트의 의미에서 대자를 의미한다. 향유는 철저하게 나의 것인 나의 향유이다. 그것은 소통할 수 없음의 의미에서 나의 것이 아니다 - 향유가 출현하는 무수한 의식들 사이의 예비적인 소통가능성을 지시하는 것. 그것은 앞섬(avant)이다. 욕구의 자아는 "나와 나를 제외한 타자들" 혹은 "나에 관한 한(quant à moi)"이라고 말할 때의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배고픈 사람은 귀가 없다"고 우리가 말할 때의 귀먹은 나를 의미한다. 홀로 존재하기, 고독 없이. 무고한 고독. 하이데거의 공실존(coexistence)과 관계하는 죽음의 고독이 아닌 것.
어떻게 향유의 대자는 욕구의 존재가 아닌 것과 관계맺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고독은 공실존의 토대 위에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f.2> 어떻게 이 대자는 결핍(déficient)의 양태가 아닌 그런 것일 수 있는가?
나의 실존은 공기 안에서 부유하지 않는다. 나의 향유에 제공된 대상 모두는 나를 위한 - 나의 향유 - 를 위한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이 대지를 제외하고. 땅 위에 발을 딛는 것(se pose)은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 앞선 것이다. 땅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근원적이다: 땅과 나의 관계, "접촉을 느끼다"라는 사실, 두 발로 자신을 유지하는 정립(position)의 근육의 긴장은 내가 대상에 대해서 가지는 긴장이 아니라, 이것으로부터 내가 대상에 대한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이다. 기반은 대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면적이 아니다. 지반은 이 모든 경험을 지지하고 떠 받치는 것이다. 자리 안으로 물러선 자리는 저항으로서의 노력이라기 보다는 이 노력 그 자체의 조건이다. 나는 하나의 장소를 가진다. 그런데 그것은 유일하게 나를 짖누르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나를 짖누르는 것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한다. 자기를 정립하는 행위, 자리를 잡는 행위(l'acte de se poser)는 정확히 행위(사유작용l'acte)하지 않음에 있으며, 자발성을 취하지 않음에 있으며, 다시 말해 휴식, 출발점의 근본적인 수동성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나를 일으켜서, 걷고 그리고 다시 기반으로 물러선다. 나를 기반에 포기하면서. 여기는 자기의 절대적인 참조이다. 나의 사유는 여기이다. 나의 사유는 빛의 발광이며, 머리로부터 나온다. 땅위의 나의 자리 안에 자리잡는 사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자리잡기가 있다. 사유의 자리잡기는 사유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사유가 전개되는 것이다. - 그리고 사물들? 여기? 이것들 사이의 관계는 결국 나(자아)와의 관계 하에 놓인다. 나의 사실인 지속성(insistance)을 그들은 결하고 있으며, 이 지속성은 사유도 감정도, 사유작용(l'acte)도 아니다. 그것이 사유작용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이미 자신의 장소를 넘어서기 때문이며, 장소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사유작용에 앞선다. 자리는 절대적으로 주체와 동시적이다. 전적으로 하나의 사건이면서, 어떤 장소에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자리, 정립은 초월성 없는 내재성이다.
<f. 3> 내재성 - 여기에 머문다는 사실은 대자의 사건 그 자체이며, 향유의 조건이다. 강한 의미에서 초월론적인 철학: 땅은 탁월한 조건이다. 그리고 이 조건은 언제나 가능성의 조건이다 - 잠재성. 가능성의 조건은( Bedinggung des Môglichkeit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grund des Môglichkeit의 의미에서). 토대의 이념 그자체의 원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ici)와 저기(Da). 저기는 초월성이다. 여기 = 땅 위 = 탁월한 내재성. 하이데거는 향유에 개념, 그것의 대자성에 무지하다. 하이데거는 진리 = 전개 = 존재 안에서의 사건. 진리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향유의 대자는 진리의 이면에서 작동하며, 존재론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완성된 지평들 안에 머문다 - 삶, 진리가 아닌. 인식도 아닌 혹은 자기의 진리 (자기의 진리는 이미 내가 떨어져 나온 무한을 전제한다). 대자의 발가벗음, 지반에 자기를 포기함 안에서 자기에의 참조 그리고 이 수동성(사유작용이 아닌). 중심에 있는 여기 - 세계는 자기를 향유에 제공하기 위해 여기에 이른다. 자아 - 존재와의 관계가 아닌, 자아의 떨림. 이 떨림은 긍정과 세계의 지향, 인식 등등을 전제하는 세계의 부정에 환원불가능하다. 부정에 환원불가능한 자아의 운동: 아담의 천국의 주체화, 무고한 에고이즘, 내재성: "태양 아래 한 자리"를 목적으로 해서가(en vue de) 아니라, 세계에서 단지 자기로 존재하기 위해 한 자리를 빌리면서 자기 안에 머물기. 거주, 전적인 자기를 짖느리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기(déemcombrement), 대상을 사유함이 없이, 기획을 새움이 없이, 가능성(pouvoir) 없이 포기하기(s'abandonner). 모든 사유와 기획의 조건.
따라서 지식이 아닌 향유. 직접적으로 주관적인. 자아<f. 4> 모든 지식은 우리를 상호 주관성 안으로 인도한다. 가르침, 타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변경, 향유에 제한된 세계의 이면. 이 세계의 이면을 차지하기. 이것이 이성이다.
어떻게 향유는 의식 없는 단순한 실존과 구분되는가? 동물적 향유와 구분되는가?
향유의 대상은 본능 안에 기입된 목적론적인 연장과의 단절이다.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기. 삶에서 맛보기(goûter à la vie).
본능적인 삶 안에서, 욕구는 그것의 만족과 분리되지 않는다(?). 짐승은 풍요로우며, 인간은 비참하다. 아무런 수단 없이: 벌거벗은, 굶주린, 가릴 지붕도 없이, 벌거벗음을 극복하는 것, 그것은 동물적 본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고 일하고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성숙은 본능적 삶의 종말이다.
그리고 비논능적인 향유는 무엇인가? 주체와 주체의 향유와의 분리: 놀이 - "식욕을 촉진한다"고 했을 때의 욕구의 촉진(appétit). 다른 한편, 향유하기 = 세계의 비인격적인 리듬에 참여하지 않기. 범신론적으로 향유를 고양하는 잘못된 문학 - 인간을 마치 엑스타즈나 요람에 놓아야 하는 원시인이나 아동처럼 생각하는 방식. 인간은 리듬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는 데에 있다. 노래 = 아무런 힘도 없는 말 - 향유는 인격적이며 대자적이다. 왜냐하면 향유는 대자적이며, 그것은 욕구에 앞서기(자아는 자기를 돌보기)때문이다. 나와 대상(욕구)과의 놀이, 놀이(욕구의 촉진)가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는 밖에 존재한다. 세계는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손을 가진다; 나는 취해야 한다. 그런데 그로 인해 고통스럽고 일을 해야 한다. 향유는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욕구에 대한 향유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채워지는 결핍,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향유의 완성과 그것의 자기 충족성을 모른다. 욕구는 향유 = 0의 기호가 아니다. 모든 향유는 대자적이기 때문이며, 욕구를 앞서기 때문이다. <f. 5> 가장 순수한 행복은 이 행복의 욕구의 촉진에 앞서야 한다. 이것 없이는 누구도 행복을 향유할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은 자기의 상실일 것이며, 우리가 흡수한 대상에 흡수되는 것이다. 향유의 인격성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행복의 빈곤에서이다. 자아는 빈곤하다. - 결국 플라톤의 분석은 정확하지 않다. 그는 단지 욕구의 고문의 비참만을 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향유의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물론 일의 필연성, 일의 불가능성 - 실업 - 항상 가능한 프롤레타리아의 조건)
욕구의 대자는 욕구를 지지한다 = 세계와 우리의 거리. 놀이가 있다. 거리는 욕구의 정지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명상의 조용함 - 그런데 욕구 안에서.
가능성(puissance)은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며, 그것은 대상과 관계한다. 가능성은 일이며, 취하는 것이다; 미래로 향해서가 아니라, 밖을 향해서. 창조적이 아닌: 소여를 지배하기. 가능성의 기관은 손이다. 가능성의 미래는 현재이다. 자기로 향하기! 최상의 행위. (질료의 전통적인 전실존). 소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 "요리"해야 한다. 취해서 요리하기! 익히기 - 생산의 의미. 소비할 수 없는 세계. 그 자체로 그것을 나를 초월한다. 그것의 무한성에서가 아니라. 따라서: 거리를 취하기. a) 욕구를 가정하는 것, 세계에 흡수됨이 없이 세계 안의 존재가 되는 방식; b) 날것의 소비할 수 없음. 세계와 거리를 취하기 때문에, 대자의 향유. 세계의 무관심성은 주체가 자기로부터 물러난 관대의 결과가 아니라, 주체가 날 것인 그리고 취해야 하는 세계 안에서 자기집에 머물기 때문이다. 자연이 향유의 자아에 대해 자연의 무관심성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 <f. 6> 본능은 소비할 수 있는 것 안에 정착한다. 인간은 자기집에 머문다. 인간은 추위와 집 없이, 비참한 굶주림 안에서 존재했었기(était) 때문에 - 인간은 자기집에 머물 수 있다. 세계의 무관심성: 취해야 하는 세계와 날것인 세계. 손은 취하기 위해 그리고 변형하기 위해, 자르기 위해. 만들기 위해. 익히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또한 손은 즐기기, 향유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제 3의 거리의 형식: 놀이. 도구는 손의 연장이다. 그런데 또한 장난감이기도 하다. 일을 향유하라!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멀리하게 하는 자연의 날것을 제거한 문화적 대상들.
그런데 나의 가능성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 도구가 나를 앞서서 존재한다. 타인들을 위한 노동. 자본.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설치들. 도구 만큼 과거와 덜 관계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항상 존재했다. 자동차, 비행기, 전화! 시간의 질서의 혼동이 아닌, 우리는 이것들은 상점들에서 발견한다.현재가 된 익명적인 과거와의 소통의 구매. 역사를 대체하는 구매. 기술적인 향유의 자아는 역사가 없이 현대적이다. 상품이 된 향유의 대상들. 돈이된 가능성.
문명 = 이방인들과 함께하는 사회.
현대는 과거를 책임진다. 역사 - 모방해야 할 대단한 형상들.
나는 태어났다. 욕구를 가진 존재 그리고 소비할 수 있는 물질 안에 정착하지 않은 존재. 나는 자연을 가진다. 나의 조건 - 땅, 그것으로부터 나는 가능성과 나의 먹거리를 획득한다. 농부. 지평에 한정된 세계. 뿌리내리기.
- 문명은 이방인들과 함께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아직도 이방인들을, 이민자들을 환대하지 못하는 이 문명은 아직 야만임에 틀림이 없다. 레비나스의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믿음은 삶에서 존재를 맛보라!라고 말한다. 살기 위해 살지말라고, 먹기 위해 먹지 말라고,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지 말라고 말한다. 후설의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 놀라운 진술은 레비나스의 철학의 출발점에 놓여 있음을 여기서도 다시 확인한다. 반-코페르니쿠스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초월론적인 주체성의 철학의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