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미셸 앙리, 블랑쇼 - 삶, 밤의 작업(품) 혹은 초월론적인 가상

aurorepark 2009. 11. 7. 15:45

앙리는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를 읽으면서 "밤은 실재의 본질이다"(『현시의 본질』(EM)  549) 라고 말한다. 이 "밤의 작업, 이 밤이 이루는 작품은 자신의 가능성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실질성(effectivité) 안에서 밤에 의한 드러남의 완성이며,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밤의 보이지 않으며 근원적인 빛으로서의 밤의 규정"이다(EM, 554). 이 밤은 레비나스의 '불면의 밤'과 블랑쇼의 '밤들'을 불러일으킨다. 블랑쇼의 작품, 작업, 그리고 작품(l'oeuvre)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작품의 부재(désoeuvrement)의 운동과 작가의 고독을 생각나게 한다. L'oeuvre, 그것은 '작품'이며, '작업'이며, 끝없이 진행되는 '일'이며, 살아있는 일, 작업, 작품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 안에 일, 작업, 작품의 부재(désoeuvrement)를, 행위의 무위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이며, 이 필연성은 밤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블랑쇼가, 그뿐만 아니라 레비나스, 데리다가 'l'oeuvre'라고 쓰는 이 말은 우리말로 단순히 '작품'이라고 옮기기에는 그 말이 지닌 무수한 뉘앙스를 다 살릴 수가 없다. 그 말은 작품이며 일이며 작업이며, 행위이며, 무엇인가 일어나고 성취되고, 일어난 일이 지워지고 취소되는 움직이는 어떤 살아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대상으로 잡을 수 있는 세상의 책, 대상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이 말을 그냥 '작'이라고 옮기고 싶은 유혹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떠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지울 수 없는 접근할 수 없음이며,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며, 바로 이로 인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블랑쇼, 『문학의 공간』, folio, 348)

 

조르쥬 바타이유는 『내적 경험』에서 이러한 밤의 경험을 "알려지지 않은 것(l'inconnu)만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신학"(Gallimard, 120)에 대한 질문들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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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의 <바깥, 밤>이라는 제목이 붙은 부분에서, 그는 두 종류의 밤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그 밤의 바깥, 외재성에 대해서 말한다. 이 외재성은 칸트와 레비나스의 외재성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서 파악되지 않는, 잡히지 않는, 잡을 수 없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블랑쇼는 밤이 주는 환상, 피할 수 없는 가상에 대해서도 말한다. 천천히 읽는다. 천천히 읽어야 한다.

 

 

"작품은 그것의 불가능성의 체험인 그 중심으로 향하는 이를 유혹한다. 경험은 여기서 본래적으로 어둡다. 그것은 밤의 경험이다. 밤에, 모든 것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것은 최초의 밤이다. (...) 그런데 모든 것이 사라진 밤에, "모든 것의 사라짐"이 나타난다. 이것은 또 다른 밤이다. 밤은 모든 것의 사라짐의 나타남이다. 그 밤은, 꿈이 잠을 대신할 때, 죽음이 밤의 심연을 지나갈 때, 밤의 심연이 사라진 것들 안에서 드러날 때, 예감되었던 것이다. 출몰, 유령, 꿈은 이 텅빈 밤에 대한 예감이다. (...) 여기서 어둠은 아직 어둠이 아니며, 죽음은 아직 죽음이 아니다. 밤에 나타나는 것, 그것은 나타나는 밤이다. 이 낯섬은 다만 밤의 요구에서 그리고 밤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을 보이게 하는 그런 보이는 않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때에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보기를 그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이 그칠 수 없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 여기서 유령은 밤의 유령을 피하기 위해 잠재우기 위해 거기에 있다. 유령을 봤다고 믿는 자들은 (...) 밤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다.

 

최초의 밤는 친절하다. 노발리스는 그 밤에 시를 헌사한다. 그 밤에 대해서 우리는 마치 그것이 어떤 내밀성을 가진 것처럼, 밤 안으로라고 말한다: 우리는 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과 죽음으로 거기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또 다른 밤은 친절하지도 자신을 열어 보이지도 않는다. 거기서 우리는 항상 밖에 존재한다. 그것은 문을 걸어잠그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 아니다. 가까운 그런데 다가갈 수 없는, 거기에 우리는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입구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밤은 접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기에 다가감은 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밤의 밖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거기서부터 탈출하는 것의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이 밤는 순정한 밤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순하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시적인 하늘, 그 하늘을 명상하면서 말한 텅빈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밤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 없는 밤이다. 그런데 그 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가 길을 잃어버리는 혼동이 아니다. 그것은 속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밤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안에서, 우리는 죽음을 발견한다.우리는 망각에 이른다. 그런데 다른 밤은 우리가 발견할 수 없는 죽음이며, 잊혀지지 않는 망각이며, 망각 안에 휴식 없는 기억이다." (블랑쇼, 문학의 공간, folio, 213-214)

 

망각 안에 휴식 없는 기억, 프루스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

 

<오르페우스의 시선>이라는 표제가 붙은 부분이다. 오르페우스의 작품에 대해서 그의 작업, 그가 망친 일에 대해서, 일을 망친 그의 실수의 <여정>(mouvement)에 대해서, 그리고 이 실수의 운명에 대해서, 피할 수 없는 그의 <여정>에 대해서, 그 실수가 아닌 다른 선택도 그 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바로 거기에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면 "무수한 그렇다"가 존재한다. 그 무수한 "그렇다"는 매번 매 순간 솟아나는 새로움들이다. 의식의 시간의 종합에 의해서 종합되지 않으면서 매 순간 그 안에서, 솟아나는 반짝임들, 즉 작품들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가상임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다시 질문되어져야 하는, 작품의 부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렇다"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 "그칠 수 없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밤의, 혹은 "죽음의 정지"로서의 "또 다른 죽음", 혹은 라캉이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말하는 "두 번째 죽음"의 그 중심을 잡을 수 없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월론적인 가상을 본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인내와 조바심에 대해서 그리고 진정한 인내심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모든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인내에 대해서, 이 인내의 통시적 시간의 시간성의 리듬을 감지해야 한다.  

 

"오르페우스가 유리디스를 찾아서 내려갔을 때, 예술은 밤을 여는 힘이 된다. 밤은, 예술의 힘에 의해, 예술을 반기고, 그로써 밤은 친절한 내면성,이해와 공감이 된다, 첫 번째 밤. 오르페우스가 찾아서 내려간 유리디스, 그녀는 그에게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극단이다. 그녀는 (...) 예술, 욕망, 죽음, 밤이 향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어두운 중심이다. 그녀는 밤의 본질이 다른 밤으로 접근하는 순간이다.

 

오르페우스의 작업은 심연으로 내려가는 것은 이 중심에 도달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의 작업은 이 중심을 낮으로 데려와서 그것에 형상과 모습와 현실을 주는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이 중심을 정면으로 보는 것만을 제외하고, 이 밤 안의 이 밤의 중심을 보는 것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는 그것에로 내려 갈 수 있으며, 더한 힘으로 그는 그것을 자신으로 끌어당길 수 있으며, 자기와 더불어 저 위로 끌어 올릴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우회하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우회, 그것은 그 중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이 밤이 드러내는 감춤의 의미이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그 <여정>에서 그가 완수해야 할 이 작업을 잊는다. 필연적으로 그는 그것을 잊는다. 왜냐하면 그의 <여정>의 궁극적인 요구, 그것은 작품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 중심 앞에 있다는 사실, 그것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 본질은 드러나며, 여기에서, 밤의 중심에서, 본질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가상이다.

 

그리스 신화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심연의 경험 - 그리스인들이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인지했던 그 경험, 작품이 자신의 과잉을 시험하는 그런 경험 - 이 그 자체로 도달하지 않을 때에만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심연은 정면으로 자신을 배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 안에 자신을 감추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핵심의 되돌릴 수 없는 대답. 그런데 신화는 또한 오르페우스의 운명이 이 법에 복종하지 않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인색하지 않다. 잘 아는 것처럼, 유리디스를 향해 돌아서면서 오르페우스는 그의 일을, 작품을 망친다. 작업은 즉각적으로 지워지고, 유리디스는 어둠으로 돌아선다; 밤의 본질은 그의 시선 아래에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오르페우스는 일과 유리디스와 밤을 배반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리디스로 돌아서지 않는 것이 유리디스가 낮의 진리에, 일상의 즐거움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 그녀가 밤의 어두움에 머물기를 원하는, 그녀의 단단히 닫힌 육체와 봉해진 얼굴로 그 밤의 힘의 멀어짐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그녀가 보여질 때가 아니라, 그녀가 보여지지 않을 때 보기를 원하는, 친숙한 삶의 내밀성에서가 아니라, 모든 내밀성을 제외하는 낯섬 안에서 그녀를 보기를 원하는, 그녀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안에서 그녀의 죽음을 생생하게 가지기를 원하는 그의 <여정>의 그 제한 없고 신중하지 않은 그 힘을 덜 배신하는 것도 그 힘에 덜 불충실한 것도 아니다.

 

그가 지옥으로 찾으러 내려간 것은 단지 이것이다. 그의 작업의 모든 영광, 그의 예술의 모든 힘, 낮의 찬란한 빛 아래에서 행복한 삶의 욕망 그 자체는 유일한 하나의 염려에 모두 희생된다: 밤이 감추고 있는 것, 다른 밤, 나타나는 감춤을 밤 안에서 바라보기.

 

낮을 아무런 정당화 없이 광기로 혹은 과잉의 속죄로 선고하는 무한히 문제적인 이 <여정>. 낮을 위해 지옥으로의 하강, 그 공허한 심연으로의 <여정>은 이미 과잉이다. 오르페우스가 돌아보지 말라는 금지의 법을 어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둠으로의 하강, 그 첫발 자체가 이미 이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이미 오르페우스가 유리디스를 향해 돌아보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감할 수 있다: 그는 어둠의 부재 안에서, 자신의 부재를 감추지 않는, 무한한 자신의 부재의 현전이었던 이 가려진 현전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으며,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졌다. 만일 그가 그것을 보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에 이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는 거기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안에서 그도 역시 부재한다.

 

낮은, 오르페우스의 기도를 판단하면서, 인내가 부족했다고 그를 비난한다. 오르페우스의 실수는 유리디스를 보고자 하는, 그녀를 소유하고자하는 욕망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운명은 그녀를 노래하는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노래 안에만 존재한다. 그는 노래 안에서만 그녀와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는 유리디스를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는 노래라는 제한된 한계를 넘어서 그녀를 욕망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도 잃어버린다. 그런데 이 욕망과 잃어버린 유리디스와 산산히 부서진 오르페우스는 노래 안에서도 필연적이다. 마치 작품(oeuvre)이 영원한 작품의 부재(désoevrement)를 겪듯이 말이다.

 

오르페우스는 인내의 결핍은 유죄이다. 그의 실수는 무한을 말리고자 한 것이며, 끝이 없는 것에 끝을 놓고자 한 것이며, 이름을 놓을 수 없는 곳에 이름을 놓고자 한 것이며, 실수의 끝없는 여정 그 자체를 유지하지 않은 것이다. 조바심은 시간의 부재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인내는 이 시간의 결핍을 지배하고자 하는, 이 시간을 다른 시간으로 만들면서, 다시 말해 다르게 측정된 시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간계이다. 그런데 진정한 인내는 조바심을 배재하지 않는다. 전자는 후자를 자신의 내밀성 안에 지닌다. 인내는 끝없는 지속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조바심이다. 오르페우스의 조바심은 따라서 정당한 <여정>이다. 그것 안에서 그의 고유한 열정이 시작된다. 그의 가장 지고의 인내, 죽음 안의 그의 무한한 거주가 시작된다." (블랑쇼, 위의 책, 22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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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은 <영감>, <선물과 희생>이라는 표재가 달려있다. 영감은 밤의 본질이 비본질이 되는, 친절한 밤이 속임수의 함정이 되는 또 다른 밤으로의 변형을 가져오는 것이다. 염감은 이로부터 우리에게 실패의 예감을 던져준다. 그런데 이 실패는 진정성이 드러나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그렇게 모든 일이 일어난다.  

 

 

"만일 세계가 오르페우스를 심판한다면, 작품은 그의 잘못을 심판하지도 밝히지도 않는다. 작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마치 법을 어기면서, 유리디스를 바라보면서, 오르페우스는 작품의 가장 깊은 요구에 복종하는 것처럼, 또 마치 어떤 영감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이 여정에 의해서, 오르페우스가 지옥의 어두운 그림자에 만족하는 듯이, 자기도 모르게 이 어둠을 작품의 대낮 안으로 가져오는 듯이 그렇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욕망의 조바심과 부주의로 법을 잊으면서, 유리디스를 바라보기, 이것이 영감 그 자체이다. 따라서 영감은 밤의 아름다움을 공허의 비실재로, 유리디스를 어둠으로, 오르페우스를 죽음으로 변형시키는가? 따라서 영감은 밤의 본질이 비본질적인 것이 되는, 친절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첫번째 밤이 속임수의 함정이 되는 또 다른 밤으로 변형되는 문제의 순간이 되는가? 이것과 다르게 될 수 없다. 영감으로부터 우리는 실패를 예감하며, 고삐 풀린 폭력을 인정할 뿐이다. 그런데 영감이 오르페우스의 실패를 유리디스를 두번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면, 영감이 무의미와 밤의 공허를 말한다면, 실패와 무의미로 향하는 영감이 저항할 수 없는 <여정>에 의해 오르페우스를 돌아보게 하고 그를 강요한다면, 이 때 모든 것은 마치 실패를 포기하는 것이 성공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처럼, 또 우리가 무의미, 비본질적인 것, 실수라고 부르는 것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위험을 부릅쓰는 자에게 마치 모든 진정성의 근원인 것처럼 드러나는 것처럼 일어난다. (...)

 

작품은 이 순간 그의 불확실성의 절정에 이른다. ...작품은 그래서 이러한 영감 안에서만 확실히 성공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작품은, 밤은  "너가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 한에서만 너는 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보호한다. ...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작품이, 일이 문제가 되는 경우 그에게 주어진 최상의 선물(le don)이다. 그 선물 안에서 그는 작품을 거부하고, 그 안에서 그는 욕망의 과잉에 의해 움직이는 여정에 의해서 기원으로 자신을 이끌면서 작품을 희생시킨다. 그 시선 안에서 그는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작품으로 작품의 기원으로 자신을 이끈다.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신성한 밤(la nuit sacré)과의 연결을 끊으며, 한계들을 넘어서며, 신성한 밤의 본질이 포함하는 있는 법을 어긴다.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따라서 극단적인 자유의 순간, 계기이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계기이며, 가장 중요한 사건인 시선은 작품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키며, 이 작품에 포함된 신성을 자유롭게한다. ...시선에 의한 영감은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이 욕망은 조바심에 의한 근심없음과 연결된다. 조바심이 없는 자는 절대로 이러한 근심없음에 이를 수 없다. 그가 이른 이 순간에서 근심은 자신의 고유한 투명성과 조우한다. 그런데 조바심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자는 절대로 오르페우스의 이 가벼운, 이 근심 없는 시선에 이를 수가 없다. 따라서 조바심은 깊은 인내의 심장이어야 한다. 무한한 기다림, 침묵, 인내의 자기를 감춤은 그의 중심으로부터 다만 극단의 긴장으로부터 피어나는 불꽃만이 아니라, 이 기다림을 회피하는 반짝임, 걱정 없음의 행복한 우연으로서의 밝힘, 조바심을 드러낸다.

 

글쓰기는 이렇게 오르페우스의 시선과 더불어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선은 노래의 운명과 걱정을 떨쳐버리는 욕망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 영감의 그리고 걱정 없는 결정은 기원에 이르며, 노래를 희생한다. 그런데 이 순간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오르페우스는 예술의 힘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쓰기의 운동에 의해서 열려진 공간으로 자신을 데려가는 그 순간에 도달할 때에만 우리는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쓰기 위해서는 이미 쓰기가 있어야 한다." (228-232)

 

데리다가 "기원의 글쓰기(Archi-écriture)"라고 부르는 것, 데카르트가 "일련의 생각되어 진 것(chaîne de pensées)", 프로이트가 잔여로서, 생각되어진 것(Gedanken)", 일련의 기표들이라고 부르는 것, 후설이 현상학적 잔여라고 부르는 것, 칸트가 대상 일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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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타남(appar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음의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의 사라짐>이 이어서 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나타남은 정확히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아직도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을 때, 이 결핍은, 결여된, 감춰진 것으로서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340).

 

Noli me legere, 나를 읽지 말아요! Nori me tangere 나를 만지지 말라! Lazare veni foras, 라자르, 자 일어서서 밖으로 나와라! 예수가 나흘만에 부활했을 때, 그를 만지려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블랑쇼는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이와 같다고 말한다. 작품은 작가에게 "나를 읽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작품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유한한 대상이 아니라, 작가가 독자가 끝없이 다시 시작해야하는 감당해야 하는 '일', 무한한 과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칸트적인 용어로 규제적 이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끝없는 과업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가 아니다. 블랑쇼는 다시 예수가 라자르에게 던진 말을 반복한다. "라자르야, 일어서서 밖으로 나와라!"(257) 작가와 독자의 역할은 결국 "시체의 공허함"(257)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이미 감은 눈을 삶에로 열어주기 위해" 끝없이 읽고 쓰는 것이다. 나타남과 사라짐, fort-da,  작품은 끝없이 자신을 주면서, 자신을 다시 취하면서 자신을 실현하면서, 자신을 지우는, 현전이면 부재인 작품은 결국 블랑쇼에서 "상상적인 것에 대한 두 해석"이라는 글에서 '시체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미지는 첫눈에 시체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놀라운 짧은 글에서 블랑쇼는 질료 없는 형상으로서의 이미지와 형상 없는 질료의 이미지를 다룬다. 전자는 보통 심상(l'image mental)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이미지에 대한 이해이다. 후자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나는 질료 현상학 혹은 물질 현상학을 말하기 위해 블랑쇼를 오래  길게 읽으면서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읽어보자. 우선 이미지는 형상과 더불어 자신을 형성한다. 

 

"이미지는 물론 그것이 자신을 깨울 때, 혹은 우리가 그것을 깨울 때, 우리에게 형상을 가진 빛의 서광 안에서 대상을 표상한다. 그런데 이미지는, 비규정성의 비형상의 과잉 안으로 자신을 던지기 전에, 그것이 부분으로 참여하고 있는 심연(le fond)과 더불어, 근본적인 물질성, 아직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는 부재와 더불어 그렇게 한다. (이 세계는 형용적인 것과 실체적인 것 사이에서 진동한다)."(342)

 

이미지는 처음보면 시체를 닮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시체의 낯섬이 이미지의 낯섬이 되는 방식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블랑쇼는 말한다. 여기서 블랑쇼가 말하는 시체는 잘 정돈된 장례를 위해 준비된 그런 죽음이 아니다. 그가 말하듯, dépouille mortelle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버려진 죽음, 짐승들에 의해 살이 다 벗겨진 죽음, 만신창이가 된 죽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우슈비치에서 구덩이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죽은이들을 말한다. 이런 시체는 우리의 공통의 범주를 넘어선다. 

 

"어떤 것이 당신 앞에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도, 어떤 실재도, 한 때 살아있던 것과 동일한 어떤 것도, 타자도, 다른 것도 아니다. 여기에, 발견되어진 장소의 절대적인 침묵 안에 있는 것은 그런데 전적으로 여기에 있음을 실현하지 않는다. 비록 죽음이 마치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토대처럼 무겁게 여기에 기대고 있다고 할지라고, 이 죽음은 장소와의 관계를 중지시킨다. 바로 그는 이 장소를 결하고 있다. 장소가 없다. 시체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는 다른 곳에 있지도 않다. 아무 곳에도? 그런데 바로 이로 인해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곳이 여기가 된다. 그래서 시체의 현전은 여기와 아무 곳도 아닌 곳과의 관계를 세운다."

 

시체의 현전은 여기와 아무 곳도 아닌 곳 사이의 관계를 세운다고 말한다. 급하게 이 둘 사이의 관계가 하이데거의 죽음과 세계와의 관계로 읽지는 말자. 블랑쇼는 바로 이 둘 사이의 이행의 불가능성, 죽음을 어떤  종류의 형상으로도 지양이나 변형의 불가능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여기는 무차별의 심연으로 열린 내밀성, 이 무차별성의 지지가 된다. 익명적인, 중성적인 세계를 떠 받치는 여기가 된다. 이로 인해 여기는 세계의 여기가 아닌, 무한으로 열린, 통시성으로 열린 여기가 된다. 

 

"여기에 시체가 있다. 그러나 이어서 여기는 시체가 된다: "어떤 "저기-위"(là-haut)로 고양됨이 없이, 절대적으로 말해서 여기-아래"(ici-bas). 우리가 죽는 장소는 아무 장소가 아니다. 우리는 이 시체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의지적으로 옮길 수 없다: 죽음은 자신의 자리를 집요하게 차지하며, 그래서 그는 그 자리와, 그것의 심연, 바닥까지 자신과 일치시킨다. 그로 인해 이 장소의 무차별성, 앞서 아무 장소에 버려진 그 사실은 죽음으로서 자신의 현전의 깊이가 되며, 우리가 여기에 놓아야 하는 차이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심연으로 열린 내밀성, 이 무차별성의 지지(support)가 된다.

 

머뭄은 죽은 자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죽은 자(défund)는 더 이상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를 그에 뒤에 남겨 놓는다. 그런데 뒤는 바로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시체를 말한다. 시체가 물론 여기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세계,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가 자기 뒤에 남겨 놓은 이 세계 뒤에 머문다. 여기로부터 이제 세계는 배후 세계, 뒤로 돌아감(retour-en arrière), 규정되지 않은, 결정되지 않은 무차별적인 지속되는 어떤 것의 가능성을 긍정한다."(345)

 

죽은 자는 우리의 의지로 그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다른 것으로 전향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면으로 자신의 여기의 심연으로 내려갈 뿐이다. 이것은 후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초월성, "내재성 안의 초월성", 초월성 일반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으로 환원되어질 수 없는 나타남의 창고, 현상학적인 잔여로서의 초월성을 지시한다. 혹은 칸트의 자기-촉발(auto-affection)을 지시한다. 이 순간에, 그가 무엇으로도 우리에 의해 다른 것으로 전향될 수 없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과 닮을 뿐이다. "시체의 현전은 우리 앞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의 현전이다. 이로써 죽은 자는 자기 자신과 닮기(ressemble à lui-même) 시작한다. 자기 자신을? 이 이상한 표현은 그가 그랬던, 그가 살아 있었을 때 그러했던 것과 닮는다는 말인가?  ... lui-même, 그 자신은 익명적인, 먼, 접근 불가능한 존재를 지시한다. ...그가 마치 자기에 의해 이중/더블(le double)인 것처럼, 닮음, 이미지에 의해 그는 이 자기의 익명성과 결합한다."(346)

 

"그는 자신을 닮았다(se ressemble). 시체는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이다. 그는 그가 여전히 나타나는 이 세계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 그는 한 이미지가 가지는 관계들, 어두운 가능성, 살아 있는 형상 뒤에 항상 현전하는 그림자이다. 그는 지금 이 형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과 멀리 그것을 전적으로 그림자로 변형시킨다. 시체는 자신을 반사된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그런 반사이다. 그는 반사된 삶을 흡수하고, 그것의 유용한 가치와 진리를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것의 비유용성과 중성적인 가치와 실체적으로 동일화한다." (347)

 

이 자기 자신, 그림자와의 닮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레비나스의 <실재와 그림자>(1936)를 다시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프랑스의 일단의 현상학자들, 레비나스, 앙리, 데리다, 이들은 블랑쇼와 더불어 독일 현상학, 특히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이동시킨다. 그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동기는 특히 이 시체의 이미지와 관계한다. 죽음이 아닌, 죽은 자, 한 죽음의 단독성은 죽음 일반보다 그들에게 더한 무게, 아니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들이 하이데거와 더불어 죽음을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하이데거적인 죽음, 불가능성의 최상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죽은 자, 한 개인의 죽음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 그 자체를 말한다. 세계의 가능성의 열림이 아니라, 세계의 종말, 매번 하나의 죽음 매번 한 세계의 죽음, 끝, 종말을 말한다. 하이데거가 짐승은 죽지않으며, 소멸(périt, verendet)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전적으로 옳았다. 이 말이 동물과의 공동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비-인간(in-humain), 주체의 심연의 괴물성의 가능성을 열 때, 세계로의 열림이 아닌 세계 이전으로의 열림을 의미할 때, 죽음이 아닌 머뭄(demeure)을 열 때,  프랑스 현상학자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제공한다. 데리다가 "cet animal que je suis", "나인 이 짐승"이라고 했을 때, 나의 세계 안에서의 자리 이전, 즉 나의 동물적 이전성을 인간 안에 기입할 때, 이 동물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동물과의 공속성을 말하는 것도 인간의 동물적 조건으로 말하는 생물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의 동물성, 괴물성, 기억할 수 없는 것의 흔적 혹은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레비나스가 'le dire'라고 부르는 것, 말해진 것 le dit, 진술된 것 뒤에서 끝없이 다시 말하는 그 말하기의 가능성을 말한다. 데리다의 언어로 말하면, 이 남아있는 것(restance)은 그것의 되돌아 옴, 이념의 이념화, 더 정확히 유령의 유령성spectralité, 그 여정, 존재론을 유령론hantologie으로 대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이어서 미셸 앙리의 삶, 밤의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 할 차례이다. 이어서 쓰자. 이미 너무 길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