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 환원되지 않은 거리
Walter Benjamin
<장갑>
우리가 어떤 동물들에 대해서 느끼는 혐오를 지배하는 감정은 우리가 그것들을 만졌을 때, 그들에 의해서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두려워 하는 것, 그것은 인간 안에 거주하는 어떤 것, 그것이 혐오스런 동물과 거의 다르지 않아서 그것이 이 두려움을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의식이다. 모든 혐오는 본래적으로 접촉에 대한 혐오이다. 우리는 극단적이고 과장된 어떤 행위에 의해서만 이 감정을 겨우 지배하는 데 이를 수 있다; 가장 민감한 접촉 지점이 접근할 수 없는 것(tabout)일 때, 혐오는 즉각적으로 삼켜지고 빠르게 소비된다. 이 경우에 다만 우리는 이 혐오의 감정을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극복하면서 동시에 다시 취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요구의 역설에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혐오가 연루되어 있는 그 부름에서 인간은 이 피조물과 자신의 동물적 유사성을 부인할 권리가 없다. 인간은 그것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발터 벤야민,『일방통행 sens unique』독일어 번역, Jean Lacoste, Paris, Maurice Nadeau, 147-148쪽)
- 혐오를 체험하는 자는 그 혐오의 대상 안에서 자신을 인지한다 (본다). 이어서 그는 그 대상에 의해 자기가 인지되지 않을까(보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인간은 자기가 전유할 수 없는, 책임질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타자 안에서 자신을 인지한다. 이렇게 인간은 절대적인 탈주체화 안에서 자신을 주체화한다. 벤야민이 파악하는 현대의 주체성의 진실은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수치>의 감정을 통해 폭로하고자 한 것과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에게 저항도 이러한 감정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최소한 수치가, 최소한 혐오가, 최소한 저항이 있다는 데에 희망이 있다. 그것마저 없다면 인간은 전적으로 이 존재와, 타자와 아무런 거리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라캉이 말하듯 죽음이라는 주인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장갑으로 충분할까?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한가?(라캉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분석의 시간. 기다려야한다고 말한다) 바리케이트가 필요하다. 바리케이트를 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