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위에 하양

Hier ist kein warum

aurorepark 2009. 6. 21.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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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rose est sans pourquoi, fleurit parce qu'elle fleurit." Angélus Silésius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하며, 장미는 꽃이 피기 때문에 꽃이 핀다." 안젤루스 실레시우스


"단지, 목이 말라서, 그것에 이끌려서, 나는 창문에 기대로 저 밖의 갈증을 해소할 것 같은 얼음덩어리를 갈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는 창문을 연다. 내가 그 얼음을 떼어내기도 전에 크고 건장한 남자가 내게로 백보를 걸어 내 손을 걷어치운다. "Warum? 왜?" 라고 나는 독일어로 묻는다. 그는 내 손을 창문 안으로 들이 밀면서 독일어로 "Hier ist kein warum,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고 대답한다." (Primo Levi, Si c'est un homme, 프리모 레비, <만일 그것이 사람이었다면>)    


안젤루스 실레시우스는 장미의 <이유 없음 sans pourquoi>앞에서 경탄하고, 프리모 레비는 이 <이유 없음 kein warum> 앞에서 끔찍함,공포를 체험한다. 하이데거는 유명한 <전향>이후에, <이성의 원리 5장: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에서 장미의 <이유 없음>처럼 이유 없이 도래하는 존재의 사건 Ereignis을 말한다. 진리와 비진리의 공속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론 안에는 진리의 밝힘과 가상의 물러섬을 가를 수 있는 어떤 기준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는 존재이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말하는 자, 그것은 자아가 아니라, 무의식이라고... 이 자리에 누가 <왜?>라고 물으면,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라고 라캉은 말할까? 궁금하다.   


라캉은 세미나 1권 (18장)에서 또 다른 안젤루스의 시를 인용하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도래와 존재의 도래를 혼동한다. 이 당시 라캉은 이미 하이데거의 <존재>의 개념에 많은 세례를 받은 듯이 보인다. 내가 <듯이>라고 쓴 데에는 라캉이 말하는 <존재>가 하이데거적인 <존재>인지 아니지가 나에게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아직 나의 라캉 읽기는 미천하기 때문에), 또한 라캉의 철학자들의 개념을 끌어들여 사용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신분석>의 장의 한계 안에서이며, 그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은 언제나 사용 후 자신의 것으로 변형 후 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이 된다: 왜냐하면 세계가 사라질 때,

우연성은 자신을 잃을 것이고, 본질적인 것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Angélus Silésius, <우연과 본질>)  


"Wo es war, soll Ich werden."

"Là où le ça était, le moi doit être."

"그것이 있었던 거기에, 자아는 도래해야만 한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이 언급을 라캉이 결정적으로 다루는 것은 1965년 <과학과 진리>라는 글에서이다. 이 글은 그의 <에크리> 후반부에 실려있다. 반면에 라캉은 이미 세미나 1권, 즉 1954년에 이미 이에 대한 언급과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아직 완전한 형태로 64년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미 이 안에서 그의 사유의 전개를 예감할 수 있는 것들이 이미 놓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라캉은 매번 세미나에서 이 전에 다뤘던 주제들을 반복하면서 그 주체들을 심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변경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라캉은 어느 한 시기에 고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사유가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 사유는 어떤 움직임을 가질 것이고, 거기에 어떤 변화가 가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 변화는 많은 경우 이미 이 전에 있었던 생각의 뿌리, 그것을 직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철학적 직관을 벗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의미에서 한 사상가의 전 후기의 차이는 근본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심화와 발견 혹은 명시화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라캉도 이러한 경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미나 ㅣ권에서의 라캉의 언급을 일단 읽어보자.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의 시들은 보통 신비주의적 신적 체험을 진술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여기서 라캉은 <신비적>이라는 이 형용사는 위의 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그렇게 적합한 용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라캉은 안젤루스 실레시우스가 의사였다는 사실을 여러번 강조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성, 그리고 인간의 말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이 신적인 것의 창조성이다. 그리고 이 창조성은 그 말보다 더 멀리, 말이 침묵하는 지경에 이르는 지점까지 멀리 간다.>(세미나 1권 18장)


이 54년의 글에서 우리는 64년(세미나 XI을 개시한 해이면서 <프랑스 정신분석학회>에서 제명된 후, <파리 정신분석학교>를 설립한 해) 이후의 라캉의 초상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신적인 것, 신성 déité의 창조성이라고 라캉이 부르는 것은  <무의식>, <무의식적인 것>의 창조성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의식은 분석가와 분석자의 <말>을 통해서 그 <말>덕분에, 말의 형태로 도래한다. 말을 통해 도래 한 그것은 말이 침묵하는 지점으로까지 간다. 나는 여기서 <말>을 강조하지만, 물론 이 강조는 나의 강조가 아닌 라캉의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 말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근본적인 조건은 <말을 하는 존재>를 다룬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말은 모든 상황에서 드러나는 일상적인 우리의 말 - 그것이 과학적 진술이든, 일상적 언어이든, 문학적 언어이든 간에 - 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분석>에서 드러나는 <말>을 의미한다. 물론 이 분석은 모든 종류의 분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에서 행해지는 분석,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석가가 분석자(환자)와 대담하는 <치료적 분석>에서 드러나는 말을 말한다. 우리는 보통 이 치료적 분석을 환자가 반쯤 누운 상태에서 말을 하는 <소파 위에서의 대담>이라고 부른다. 이 <정신분석의 장>, 이 상황을 벗어나면 라캉이 말하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을 통해서 드러나는 <무의식>이라는 것도 이 정신분석의 <분석>의 장을 벗어나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라캉의 책을 읽다보면. 물론 그의 글을 세심히 읽다보면, 그는 이 <분석>의 상황과 그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들을 말할 뿐이지, 이 상황을 벗어난 일반적인 상황을 지시하지 않는다. 라캉의 주체의 문제, 담화의 분석 등등도 모두 이 정신분석의 장 안에서, 분석가와 분석자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공리가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것과 달리 그에게 울려오는 분석적 상황을 이 시에서 감지한다.


<이 시는 내 귀에도 울려오는 바가 있다. 다만 내가 그 분석적인 용어를 생각하는 것은 그(Balint)와 같은 방식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공리 - 그것이 있었던 곳에, 자아가 도래해야 한다 - 는 일반적으로 소박한 <공간화>로 이해되며, <그것>에 대한 분석을 통한 그것의 통제(정복)은  뜬구름 잡는 행위l'acte de mirage로 끝이난다. 여기서 자아 le moi는 자기 자신에 대한 최후의 소외일 뿐인 자기 le soi 안에서 보여진다.>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 반해서 라캉은 이 공리는 다르게 해석된다고 말한다.


<구성하는 것은 말하는 행위이다. 분석의 진전은 자아의 장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으며, 자아에 의한 알려지지 않은 여백을 정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자아와 이드 id 사이에 행해진 미뉴에처럼 자리 이동, 전복이다. ...분석적인 입장에서 보면, 위에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황혼, 상상적인 세계의 몰락, 비인격화의 한계에서 느끼는 경험이다. 이 때에 우연 - 우연적인 사건, 심상, 잔인한 역사 - 은 추락한다. 그리고 이때 존재는 스스로 구성하기에 이른다.>  

 

"Warum? 왜?" 

"Hier ist kein warum,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라이프니찌의 이성의 원리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이유가, <의미>가 있다.

아이는 매번 무엇을 하지말라고 하면, 이유를 묻는다. 여기에 내가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고 답한다면...그 아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유가 없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레비가 경험했던 수용소에서의 그 공포와 전율을 나는 다시 라캉의 이 글에서 감지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무의식이 가능한 것은 단지 <정신분석적 상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공간을 제외한 다른 곳에는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는 이 무의식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아우슈비치의 상황은 라캉이 분석하는 <정신분석적인 상황>이며, 거기서 드러나는 <무의식>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