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주체의 문제
칸트의 비판 철학의 철학사의 기여가, 피히테의 말처럼, <주체성의 발명>에 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의 초월론적인 주체의 발명에 있다고 한다면, 대상에서 주체로의 전환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전향이라는 통속적인 주제를 넘어서, 이 초월론적인 주체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은 현대철학의 초월론적인 철학의 방향을 재고하는 데 필수적인 절차일 것이다.
칸트에서, 보다 정확히 칸트를 우회해서 데카르트에서부터 제기되는 초월론적인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질문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칸트에서 주체에 대한 질문, 다시 말해, 초월론적인 것에 대한 질문은 대상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우선 생각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대상을 "대면 en face" (ob-jectum, Gegen-stand) 한다고 했을 때, 이 대면이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대상이 사유에 도래하는가? 이 질문은 결국, 타자 Autre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어떻게 사유와 다른 어떤 것이 사유에 나타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칸트의 경험에 대한 제 2의 유비에서 드러나는 대상의 대상성 Gegenstädlichkeit에 대한 질문으로, 이 모든 질문은 칸트에서 비판의 토대가 되는 감성적인 나타남 l'apparaître sensible에 대한 반성으로 향한다.
이러한 칸트의 초월론적인 것에 대한 접근은 비판 철학의 설립에서 초월론적인 감성론의 지위에 대해서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대상이 어떻게 주어지는 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결국 주체의 자리와 주체의 의미는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질문하는 데에서 결정된다. (이러한 칸트의 기여는 '대상 a'를 통한 주체에의 접근, 다시 말해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조건들의 탐구를 통해 주체의 자리와 의미가 밝히는 라캉의 후기의 전향에 잘 드러난다.) 이 질문은 이미 후설적인 질문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후설에게 어떻게 자신에 갖힌 주체가 자기 밖의 대상으로 나아가는 가의 문제 제기의 방식(고전적인 인식론의 틀)의 전환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칸트의 전향으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철학사에서 칸트를 읽는 여러가지 방식들 중에서, 초월론적인 감성론을 객관화를 구성하는 초월론적인 분석론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문제 되어질 수 있는 상황은 나타남의 근본적인 구조로서 가상에 대한 반성인 초월론적인 변증론에 의해서만 입증된다. 이 후자는 분석론 안에서 완성되는 제한된 그리고 배제적인 객관성에서 비판을 구해내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현상이 드러나는 현상의 현상성 phénoménalité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만이 거짓된 비판적인 객관화라는 거짓된 명증성으로부터 벗어나서 변증론에 그 온전한 권리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주체성에 대한 비판의 자리인 변증론으로의 회귀 안에서, 칸트의 주체성의 진정한 자리로서의 감성론에 대한 이해를 열어보일 수 있을 것이다. 주체성을 초월론적인 가상으로 보여주는 변증론에서, 이 가상은 그 자체로 제거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로 자신의 합법성을 보존한다. 왜냐하면 주체의 가상을 포함해서, 초월론적인 가상은 그 자체로 대상의 초월성 la transcendance de l'objet에서, 그 자체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대상을 하나의 의미의 단일성으로 구성하면서 드러나는 종합 synthèse에서 가상은 필연적으로 출현한다. 왜냐하면 대상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힘으로서의 종합은 이 대상의 단일성의 궁극적인 이유로서의 동일성 ipséité, identit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칸트가 초월론적인 통각 l'aperception transcendantale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연역과정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종합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 즉 대상의 종합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종합하는 동일자 혹은 동일성에 대한 질문은 변증론에서 주체를 초월론적인 가상으로 드러낸다.
대상의 객관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초월론적인 가상, 즉 주체성의 가상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보여준다: 대상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이 아무것도 아닌 대상과의 관계 그 자체로부터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 어떤 것은, 후설의 현상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초월성, 다시 말해 하나의 대상으로 환원되어질 수 없는 순수한 드러남의 장소를 지시한다.
초월론적인 논리로 모두 흡수할 수 없는 초월론적인 감성론에서 칸트의 주체에 대한 이론이 드러난다: 주체의 촉발 l'affection du sujet. 이것은 주체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또 하나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촉발 안에서 주체가 결정되는 어떤 것이다. 지울 수 없는 본래적으로 수동적인 이 영역은 주체의 근저 le fond du sujet로서 자기의 실체 "substance" du soi를 구성한다. 여기서 실체sub-stance라고 말해지는 이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분했던 두 종류의 실체 - hypokeimenon/subjectum과 to ti en einai/quiddité -에서 전자에 해당되는 의미에서의 실체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객관화의 "여백" 혹은 "한계"에서, 다시 말해 객관화 이전에 그리고 객관화와의 본래적인 관계에서 주체는 이 관계의 한 효과 혹은 결과로서 드러난다. 촉발된 존재 l'être affecté는 어떤 존재자 l'étant도 아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촉발된 존재는 여기서 지향된 존재자의 나타남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객관화의 한계에서, 다시 말해 감성론이 분석론과의 관계에서 그리는 여백에서 주체를 생각함은 초월론적인 논리 안에 초월론적 감성론을 흡수하는 코헨 Cohen의 칸트 읽기와, 또 다른 한편 초월론적 논리 안에서 초월론적 감성론을 넘어서는 하이데거적인 칸트 읽기와 다른 현상학적인 칸트 읽기를 제시한다.
대상에 대한 질문, 즉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체, 초월론적인 것을 생각함은 다음의 사실을 명확히 한다. 주체는 하나의 토대 혹은 지반으로서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사유 안에서 생성되는 주체의 주체화subjectivation, 다시 말해 처음부터 전제된, 정립된 주체가 아니라, 사유의 외재성 안에서 언제나 이미 노출되어 있는 주체의 주체성을 의미한다.
이 글은 현상학의 한계에서 작동하는 일군의 프랑스 현상학자들의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예비적인 그리고 필수적인 절차의 하나이다. 하이데거에 의해 읽히고 이해된 칸트와 후설을, 레비나스, 데리다 그리고 미셀 엉리와 더불어, 그들로 돌아가 다시 읽는 과정은, 하이데거에 의해서 읽히고 이해된 서양 철학사를 다시 읽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