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비극적인 것'에 대하여"를 읽고
김남시 님의 글"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비극적인 것'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이 글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근대 이후에 자유로운 의지의 개인의 출현으로 '비극적 인 것', '비극적인 정감'이 사라졌는가이다. 저자가 들고 있는 예는 카프카, 그리고 박찬욱의 일련의 복수의 영화들이다. 이 예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키에르케고르의 주장과는 달리 '비극적인 것의 회귀'를 감지할 수 있다. 이 비극적인 것의 '회귀'는 이미 근대를 지나온 이후이기에 그 모습이 고대의 그 비극적인 것과는 꼭 같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고 그 고대의 비극적 진동과 울림을 지니고 있다. 이 때 저자는 이 비극적인 것의 모습을 규정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그의 <오죽하면 내가 이런 짓을 했을까>의 형태로 드러난다. 결국 저자의 결론에 의하면, '오죽하면'의 내적 동기 혹은 그 의식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주관화 혹은 내면화에 대한 힘없는 저항"의 형태로, 그 죄의 주체는 (근대적 인간처럼) 그 죄를 내면화 하기를 거부하고, 비극적, 심미적으로 이해받기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 글을 지탱시키는 논리는 고대의 비극의 외재성 혹은 타자성에 대한 근대의 주체의 자율성 혹은 내면화의 대립이다. 나는 이 대립이 유지되어질 수 있는 도식인지를 문제 삼는다. 그렇다고 이 문제삼음이 바로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간섭은, 본질적으로 소통을 향한 노력이다. 세상 앞에서 자주 절망하는 것은 이 소통의 불가능성 때문이다. 만일 각각이 하나의 벽이라면, 이 벽들 사이에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Entre les murs/벽들 사이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만일 각자가 '집'이라면, 그 집에 문과 창문이 있다면, 그 문과 창문 사이에서, 그 '문턱'에서 '창턱'에서 어떤 소통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레비나스의 '집'의 비유를 좋아한다. 레비나스에게 각각은 하나의 집이다. 집은 자신의 문과 창문을 밖으로부터 걸어 잠글 수 있는 가능성이자, 동시에 그 문을 밖으로 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우리의 절망 한 가운데에 희망이 있다. 문턱, 그것은 '말을 건내는 한 방식'이다. 나는 그 문턱에서 말을 건낸다.
이 글에서 나는 다음의 것들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1> 우선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의 출현과 더불어 고대의 '비극적인 것'이 근대의 자유로운 의식의 발견과 더불어 사라진다는 주장에 대하여.
2> 이어서 고대의 비극적인 의식과 근대 이후의 비극적인 의식이 같은 전통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
3>그렇다면 카프카의 비극적인 의식은 이들의 전통과 다른 범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저자의 글에 의존해서) 고대의 비극이 산출하는 비극적 슬픔과 근대적 이성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의 비교를 생각해보자. 그 구분에 의하며, 전자가 죄와 무죄 사이를 진동하는 비극적 심미적 죄를 형성한다면, 후자는 그 행위의 규범이 자신의 원리 위에서 결정되는 윤리적 죄를 구성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 감정에 있어서, "모든 외적인 규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아니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근대적 주체는 고대 비극에서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운명적 힘에 의해서가 아닌, 단지 그의 잘못된 행동 혹은 실수로
인해 파멸하며,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고대 비극에서의 비극적 감정 Trauer/affliction/뼈져린 고통
혹은 슬픔이 아니라, 그 개인의 잘못된 선택에서 기인하는 몰락을 바라보는 데에서 오는
고통스러움/Schmers/souffrance/douleur이다." 이 두 고통의 감정을 비교 하자면, 하나는 되돌릴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라며, 나중의 것은 되돌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그 후회와 슬픔은 전자의 고통과 슬픔에 속할 것이다. 결혼을 잘못해 인생을 망친 한 남자/여자의 고통은 아마도
후자의 고통에 속하지 않을까한다. 이러한 두 종류의 고통을 구분시켜주는 본질적인 이유는, 이어지는 글에서,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오이디프스의 파멸에서 느끼는 것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그의, 잘못된 선택 혹은 행동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이 불러낸
처절한 결과에 대한 동정에서 오는 고통스러움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비극적 슬픔은 오이디프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보이지 않는 운명의 피할 수 없는 손길을 감지하는 데에서 온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죄는, <죄와 무고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가 바로 자신을 파멸로 이끈 행동을 저지른 주체라는 점에서는 '죄'이지만 그의 그 행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필연성을 따름으로써 생겨났다는 점에서 그는 또한 '무고'한 존재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의 이러한 구분이 어느 선까지 유지되어질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의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석사 논문을 쓰던 때다. 92년이니깐, 참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비극적 의식을 다루면서 그것이 고대 비극의 비극적 의식과 어떻게 다른가, 다르지 않다면, 그것이 어떻게 같은 전통 안에 있는가를 얘기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얘기부터 하려고 한다.
고대 비극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hybris(과잉/excès)라는 희랍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정해진 정도나 척도를 넘어섬/ démesure/Übermass/Übermut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희랍인들에게 하나의 '범죄'로 여겨졌다. 헤라크레이토스가 '금지된 것/sacré/heilig'을 훔친 행위가 죄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정도'를 넘어선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정해진 정도가 있고,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희랍인들에게, 우주는, 음악의 '악보partition'처럼 - 하나 하나의 음표가 각자 자신의 자리에 각자의 음가를 가지고 배치되어있듯이, 그 자리를 바꾸거나 그 음가를 달리하면 음악의 조화는 한 순간 다 깨지는 것처럼 - 모든 것들은 다 자신의 자리와 지위와 그리고 그 정도가 모두 미리 정해져 있어, 이 질서/조화를 넘어서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존재론적으로 도덕적으로 hybris/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동일시 했다.) 그 정도와 배치의 질서를 어기고, 이 정도를 넘어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인간의 '의식의 자유'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인간 의식의 자유의 실현이, 외적 정도와 보이지 않는 운명에 저항해서 그것을 넘어서려고, 그것을 통재하려고 하는 그 시도 혹은 기도가 보이지 않는 그 힘, 운명에 부딪칠 때, 그 타자에 부딪칠 때, 거기에 비로소 비극의 감정이 생겨난다. 만약 모든 것이 이미 다 정해져 있으며, 그 정해진 바를 따른다면, 거기에는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스피노자의 세계/채계 안에는 비극이 자리할 자리가 없는가? 모든 것이 이미 다 필연이라면, 다 정해진 것으로, 그에 일치함, 그에 복종함이 다 진리라면, 그 안에는 비극이 싹틀 자리가 없을 것이다.
오이디프스의 예를 보자. 그는 자신의 신탁을 듣는다. 그는 그 자신의 정해진 바 -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한다는 신탁 - 그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피하기 위해, 자신의 부모와 왕국을 떠나서, 테베로 가서 라이오스를 죽이고 그의 부인 조카스트와 혼인을 한다. 그 후 테베에 페스트가 퍼지는 것이 바로 그 자신으로부터 연유했다는 것을 안 오이디프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방랑의 길에 접어든다. 이 이야기 안에는 끌어낼 수 있는 많은 단서들이 놓여 있다. 우선 마지막에 그의 자학의 행위로, 스스로를 처벌하는 행위로, 자신의 눈을 도려내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보자. 그의 행위, 자신의 이성에 의지해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던 hybris에 대한, 범죄에 대한 처벌은 우선 외적으로 페스트라는 파괴/némésis의 형태로 주어진다. 그런데 자연의 처벌이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가하는 이 처벌은 - 자신의 눈을 도려냄 - 운명이나, 자연의 외적 처벌하고는 다른 내적 처벌의 형태로 드러난다. 눈은 무엇인가? 눈은 이성의, 의식의 상징이다. 오이디프스의 행위는 모든 회적 규정(신탁)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스스로의 의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스스로를 판단과 진리의 주인으로 자처할 수 있게 하는 그 근대의 이성의 눈과 다르지 않다. 그 눈을 도려낸다는 것은 자신의 이성, 자신의 의식의 자유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처벌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자유로운 의식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서 만나게 되는 운명이 없다면, 비극적 카타르시스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이티프스의 비극은 자유의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비극적 존재론이다. 자유로서의 의식은 세계, 즉자와의 화해도, 타인과의 화해도 불가능한, 그래서 시지프스처럼, 끌어 올린 돌이 다시 떨어지면 또 끌어 올리는 영웅적인 비극의 자유의, 무의 의식으로 남는다. 이 자유로서의 의식의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사르트르에서, 그 반대 편의, 다시 말해 자유의 저편에 자리한 존재와 타인의 타자성의 인정으로 부터 발생한다. 타자에 전적으로 복종한다면 거기에는 비극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나의 자유가 타자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여기에도 비극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의식은, 바로 그 자신의 규정으로 말미암아, 그 '무성'으로 말미암아,("의식은 무엇인가의 의식이라면, 의식은 이 무엇이 아닌 것이다. 이 아님은 바로 세계에 부정과 무를 도래하게 하는 의식이 아니면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라는 그 유명한 사르트르의 "의식의 무"에 대한 정의를 생각하자) 그는 타자일 수도, 타자를 나로 환원할 수도 없다. 이 영웅적인 사르트르의 의식과 오이디프스의 영웅적인 의식은 어떻게 같아질 수 있는가? 이 둘은 모드 자유의 의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갇는다. 오이디프스가 자신의 운명/타자에 저항하는 자유의 모습은, 우선, 최초의 기도 - 집을 떠너서 테베로 향함 - 에서, 이어서 자신의 눈을 도려냄에서 그 영웅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소포클레스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만일 그가 운명의 승리를 말하고자 했다면, 오이디프스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도려내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우리는 희랍의 비극을 자유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마치 사르트르의 비극적인 존재론이 의식의 과잉hybris에서 연유하는 것처럼, 고대의 비극도 이 의식의 과잉에서 그 자유에서 생겨나는 비극이 아닌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카프카적인 세계인식의 비극성은 어디에 집어 넣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저자는 이 둘의 구분으로부터 카프카를 희랍의 비극적 의식의 범주에 넣어서 설명했는데, 만일,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둘이 같은 범주라면, 이제 카프카의 세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은, "고대 비극의 전범을 따르기보다는" 다른 범주에서 설명해야할 것이 의무로 남는다. 카프카의 법의 인식에 대한 논란은 들뢰즈적인 비판에 맞서서 이를 옹호하는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논의로 나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경계를 유태적 정신과 희랍적 정신의 대립이라고, 성경과 그리스 신화의 대립이라고 말해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지금 카프카의 이 법의 인식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여기서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지면을 요구라는 또 다른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다만 이 글의 맥락에서 카프카의 세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카프카의 세계 인식은 위에서 우리가 본 희랍의 비극이니 사르트르의 존재와 의식의 대립/자유와 필연성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하는 비극의 탄생과는 그 근원을 달리한다면, 그 다름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레비나스의 카프카에 대한 이해를 따르면, 바로 이 의식의 존재 자체, 존재의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 욕구 그 자체/conatus essendi, 나의 존재의 존재할 권리 그 자체를 문제 삼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도 없이, 당연히 어떤 죄의식도 없는데, 고발되어 법정에서 그들의 동일성이, 그들의 존재할 권리가, 그들의 죄없음이, 그들의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와 모험 자체가 문제로 제기된다. 나의 동일성 자체가, 나의 존재하고자 하는 자연적인 권리 자체가 문제 혹은 고소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저지른 어떤 잘못도 없이, 내가 연루된 어떤 사태도 없이, 내가 타인의 잘못에 타인의 불행에, 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레비나스가 말한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누구보다고 더 큰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가 좋은 볕 아래가 내 자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땅에 대한 강탈의 이미지의 시작"이라고 파스칼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진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조건은 나의 존재할 자연적인 권리, 나의 동일성을 '질문'할 수 있는, 문제제기할 수 있는 물러섬, 거슬러 내려갈 수 있는, 그 바닥 없는 심연까지 거슬러 내려갈 수 있는, 쉽게 "너 어디가 아픈게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을 수 있는 '병'의 상태까지 하강하는 것, 질문이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단계까지, 최상급으로까지 상승하는 것, 그로부터 마치 경매에서 어떤 물건의 가치가 계속 상승해서 올라가듯이, 질문이 심문이 되고, 심문은 결국 고소로까지 상승하는 그 현기증나는 질문의 "가치의 상승"이 일어난다. 여기에, 이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는 경계까지 물러서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심문, 고발, 그 질문의 하강과 가치의 상승 그 가운데, 카프카가 그리는 인물들이 자리하지 않는가? 카프카의 인물들이 예기치 않게 부딪치는 상황 - 고발, 재판, 변신 - 은 저자가 말히듯,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그들의 선택의 결과 그들이 맞이해야하는 파멸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고통스러움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죄'는 너무도 불투명하며, 그들의 주관성은 너무 연약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어떤 알 수 없는 힘, 운명 혹은 필연성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것/tourmenter/plagen/marterne이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가? 그 죄의 불투명성, 그 주관성의 허약함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자유인 의식을 삼켜버리는 존재의 운명, 그 타자성, 그 필연성에서 오는가? 그런데 카프카의 인물들을 보면, 자기 밖에 타자에 대항하는 어떤 자유의 의식의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 자유의 의식 자체를 문제삼는 의식일 것이다. '오죽하면'의 의식은 이 절대적인 수동성에 비하면, 너무도, 아직도 자의적인 자유의 의식으로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오죽하면'과 비교할 수 있는 그 상대적인 표현은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자기에도 불구하고 malgré soi'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