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 번역자의 과제와 글자
발터 벤야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이 책은 역자가 벤야민의 전집에서 언어에 대한 것만을 골라서 편집-번역한 것으로, 벤야민의 언어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선 유용한 자료의 역할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벤야민의 전체적인 사상의 토대가 되는 이론이 이 언어철학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벤야민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번역은 이중적으로 그 무게를 가진다. 이 책의 번역의 수준이 그 무게에 준하는지를 말하는 것은 이 책을 다 읽고 검토하지 않은 나에게는 허락되는 일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이 책 전체에 대한 <서평>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이 책이 번역이기에, 그 번역의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번역자의 과제>(1923)만을 자세히 읽는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한 장인 <파리의 풍경/tableaux parisiens> 대한 번역을 출판하면서 그 앞에 붙은 <서문>인 이 글이 나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나의 아주 개인적인 관심으로, 레비나스의 언어에 대한 성찰, <언어와 근접성>과 이 글을 함께 읽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이 둘을 같이 읽지 않는다. 나는 단지 <번역자의 과제>만에 한정해서 나의 독서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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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의 과제와 글자
Les langues imparfaites en cela que plusieurs, manque la suprême : penser étant écrire sans accessoires ni chuchotement, mais tacite encore l'immortelle parole, la diversité, sur terre, des idiomes empêche personne de proférer les mots qui, sinon, se trouveraient, par une frappe unique, elle-même matériellement la vérité.
위의 글은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말라르메의 글, <Crise de Vers>(시의 위기)이다. 이 글의 독일어 원문에서 벤야민은 말라르메의 글을 번역하지 않고/번역하기를 포기하고 ‘불어 그대로’ 옮겨놓는다. 아래의 것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최성만 옮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번역이다.
“언어들의 불완전성은 그것들의 다수성 때문이다. 탁월한 언어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즉 사유란 장식이나 속삭임 없이 글쓰기이고, 불후의 말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있다. 지구상에 어법[방언]들의 다양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들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단번에 진리로 구체화될 그런 말들을 소리 내지 못하도록 막는다.”(134)
우리말 번역 안에서, 위에 내가 고딕으로 줄친 부분은 전체의 문장 안에서 녹아서 사라진다. 벤야민은 번역자에게 본질적인 요소는 구문이 아닌 단어들이라고 말한다. 직역 wörtlichkeit 안에서 번역은, 원작을 가림이 없이, 번역의 매체를 통해 순수언어가 훤히 비쳐 나오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벤야민은 번역에서 구문은 원작 앞에 놓인 장벽이며, 반면에 단어는, 단어 대 단어는 원작 앞에 놓인 ‘홍예문’(Arkade)라고 말한다. (137 참조) 나는 여기서 “matériellement la vérité”가 벤야민의 글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이 부분의 번역은 당분간 번역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둔다. 벤야민의 글을 읽는 동안 그 의미는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벤야민은 말라르메의 이 글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이 글을 번역과 번역자의 과제로 ‘번역’한다. 벤야민에게 말라르메는 여러 시인들 중의 한 시인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모든 고유명이 그 자체로 번역을 거부하듯이, 번역의 불가능성의 ‘상징’으로, 고유명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이런 말라르메를 벤야민이 자신의 글의 중심에 놓는 이유는,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말라르메의 글 안에서, 번역 안에서 알려져 오는 진리의 언어 혹은 순수한/진정한 언어에 대한 동경/향수/욕망/Sehnsucht을 그 자신의 고유한 속성으로 가지는 그런 <철학적인 천재 philosophisches Ingenium>(134 참조)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말라르메에 대한 이어지는 벤야민의 글을 읽어보자.
“번역자의 과제가 그와 같은 빛 속에서 드러난다면,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들은 그만큼 더 내다볼 수 없이 어두워지려고 한다. 실제로 번역 속에서 순수 언어의 씨앗들이 익어가도록 한다는 과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고 어떠한 해결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의미의 재현이 더 이상 기준이 아니라면 그와 같은 해결은 바닥이 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135)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는다.
Denn wird einen solchen nicht der Borden entzogen, wenn die Widergabe des Sinnes aufhört, massgebend zu sein?/ En effet, ne prive-t-on pas une telle solution de toute base si la restitution du sens cesse d'être l'étalon? 실제로, 의미의 회복이 더 이상 번역의 척도가 아니라면, 그와 같은 해결(번역 속에서 순수 언어의 씨앗들이 익어가도록 한다는 해결책)은 토대를 잃어버리지 않는가?
나는 역자가 의문문을 긍정문으로 번역했다는 것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청유형의 의문형으로 긍정으로 옮겨도 별로 문제가 없는 문장이다. 어쩌면 문장의 이해에 있어서 더 자연스럽게 읽힐 수도 있다. 나는 한 단어의 번역을 문제 삼는다 : ‘Widergabe’.
역자는 이 글 전체를 통해서 “widergeben”이라는 동사를 “재현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더욱이 벤야민은 번역은 원작의 재현(Darstellung)이나 재생산 혹은 복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하고 있는 사정을 고려하면, 역자의 주(135 주6)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적절한 번역으로 보이지 않는다. 벤야민의 이 글을 열수 있는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단어이다. widergeben/Widergabe/Sinnewidergabe라는 이 가족은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들인데, 바로 이 단어들 안에 바로 벤야민의 번역이 관계하는 다른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135 참조) 이 단어는 역자가 말하듯이 ‘의역’이 필요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도, 의미가 모호한 단어도 아니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역자의 우리말 번역으로 읽기 전에, 불어 번역(Maurice de Gandillac 번역)으로 읽었고, 이어서 독일어 원본을 찾아서 (인터넷에서 이 텍스트는 독일의 한 대학에서 사진으로 찍어 지원하는 사진 책을 받아볼 수 있다. 참고로 Harry Zohn의 영어번역의 문제성, 그 불충분성은 Steven Rendall의 노트, "Notes on Zohn's Translation of Banjamin's "Die Aufgabe des Übersetzers""를 참조할 수 있다. 이 문건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불어 번역과 독일어를 참조하면서 우리말 번역을 읽었다. 독일어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상당히 ‘고단한’ 일이다. 당연히 나의 나중의 독서는 나의 이전의 독서에 의해 방해/중단되기 마련이다. widergeben/Widergabe/Sinnwidergabe에 대한 불어의 번역은 rendre, restituer /restitution/la restitution du sens이다. 우리말로 (잃어버린 것, 손상된 것을) <돌려주다, 회복하다 혹은 복구하다/회복/의미의 회복>이라고 번역하면 될 것이다. 이 독일어는 ‘geben/donner/주다’라는 동사에 ‘wider/re/다시’가 결합한 단어이다. 여기서 ‘주다’라는 동사에서 ‘Gabe/Don/Gift소여/선물’이라는 단어를 끌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이다. 원전과 번역의 관계가 원초적인 주어짐, 그 주어진 것은 ‘의미’이고, 그것의 회복이 번역자의 과제(Aufgabe)라는 번역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말라르메를 인용하면서 벤야민에 의해 문제로 제기된다.
이미 ‘주어진 의미’를 돌려주는 것, 회복하는 것이 번역자가 의존해야할 기준/토대가 더 이상 아니라면, 어떤 토대에서 번역자는 이 과제, 즉 순수언어의 씨앗/Samen/semence의 성숙/Reifen/maturation이라는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가? 벤야민의 글에서 무수히 만나는 은유들 중의 하나인 이 ‘씨앗’과 그것의 ‘성숙’이라는 자연주의적 은유에 일단 주목하자. 이어지는 글을 읽어보자.
“삶의 언표들이 살아 있는 자에게 무언가를 의미함 없이 그 살아 있는 자와 내밀하게 연관되는 것처럼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Überleben)에서 나온다. 번역(Übersetzen)은 그렇지 않아도 원작보다 뒤늦게 생겨나며, 자신이 탄생하는 시대에 결코 뛰어난 역자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중요한 작품들의 경우 번역은 그것들의 사후의 삶(Fortleben, 지속된 삶)의 단계를 지칭하기 마련이다. 완전히 비은유적인 객관성 속에서 예술 작품의 삶과 사후의 삶에 대한 생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124)
씨앗과 그 씨앗의 성숙은, 생물학적인 신체성 이후에도, 삶과 죽음의 생물학적 기준을 넘어서 여전히 살아남는 것, 그것이 정신이든, 역사이든, 아니면 작품이든, 바로 그 살아남은 것/Überleben, 작가가 아닌 작품과 그리고 그것을 직면하고 있는 번역자, 변역하는 주체 사이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둘 간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벤야민은 이미 번역자와 원작과의 관계에 대해서 진술한다. 우선 예술작품과의 비유를 통해서, 번역가의 의무는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수용/독자Aufnehmenden/réception의 관점에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번역자의 의무이다. 또한 번역에 본질적인 것은, 예술작품이 그러한 것처럼, 무엇인가의 전달/소통/Mitteilung/communication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특히 시 작품들이나, 성스러운 글들의 번역이 번역의 본질을 드러낸다면, 여기서 무엇인가를 소통하고자 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번역의 본질을 형성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것들(시나 성서) 안에 들어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 비밀스러운 것, 시적인 것”(122)이다. 마지막으로 원전과 번역의 관계는 “똑 같은 것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122)이 아니하면, 번역은 원작을 재현하는 것도 재산출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번역자의 의무가 독자와의 관계에서도, 전달도 재현도 아니라며, 번역자의 의무는 어디서부터 그 요구 혹은 명령을 받는가? 벤야민에게 번역은 선택사항이 아닌 의무사항이라면, 번역자는 이 의무, 숙제, 빚을 떠맡은 자이다. 번역자가 채무자라면 채권자는 누구인가? 번역의 요구/요청 Forderung/exigence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번역은 하나의 형식이다. 번역을 그 자체로 파악하려면 원작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작 속에 그 번역의 법칙이 그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통해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122)
역자는 이 글의 번역에서 형식을 받아야할 대명사를 전부 번역으로 받는다. 물론 “번역이 형식이다”라는 이 명제로부터 ‘형식의 법칙’은 결국 ‘번역의 법칙’이라고, 번역과 형식이 서로 혼동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논증의 구조가 “번역은 형식이다”라는 중요한 테제(혹은 전제)로부터, 그것이 형식이라면, 형식은 법칙을 가지며, 이 법칙을 밝히고 이어서 다시 테제/전제로 돌아가 번역과 번역자의 과제를 밝힐 수 있다는 그의 글의 논리적인 의도를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위의 글을 다시 읽는다.
“번역은 하나의 형식이다. 형식을 그 자체로 파악하려면 원작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작 속에 그 형식의 법/Gesetz이 그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통해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번역이 하나의 형식이다”라는 말은 칸트식으로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칸트에서 인식의 가능성이 감성의 형식과 오성의 규칙에 의해서 규정되듯이, 번역의 가능성은 바로 그 형식과 그 형식의 법에 의해서 결정된다. 칸트가 인식의 가능성의 선험적/초월론적 조건들을 찾았듯이, 벤야민은 이 글에서 번역의 가능성의 초월론적인 조건을 찾는다. 벤야민이 이 형식의 법이 원작의 번역 가능성/Ubersetzbarkeit에서 드러난다고 했을 때, 이 가능성이 지시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언어적인 형성물의 본래적인 번역 가능성은 비록 어떤 삶이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모든 인간들이 잊었다고 할지라고, 여전히 우리가 이 순간과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그 삶과 순간의 본질이 우리가 그것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123. 역자의 번역을 고쳤음.)
그 요구는 벤야민이 <신의 기억 또는 신의 사유/Gedenken Gottes>라고 말하는 것의 영역까지도 함축하는 것으로, 다름 아닌 번역에의 요구인데, 그것은 형식의 법의 이름으로 드러나는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정언적인 진술apodiktisch”(123)이다. 즉 ‘사실’의 문제가 아닌 ‘권리’의 차원에서의 요구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 요구는 초월론적인 요구이다. 그리고 이 요구는 위에서 말한 사후의 삶의 구조 안에서 드러난다. 번역에서 신의 사유의 요청은 벤야민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1916년 텍스트에서 번역자의 과제를 언어 혹은 이름의 신의 선물에 대한 대답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에게 번역은 신적인 사유 혹은 기억과의 교류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결국 번역의 채무를 지우는 채권자는 바로 이 신의 기억 안에서 형성된다. 이 신의 기억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사후의 삶을 얘기하듯이, 세대를 거쳐서 변동한다. 작품만이 그러한 지각변동을 겪는 것이 아니라, 번역도 세대를 거치면서 언어가 성장하고 성숙하듯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일단 뿌려진 언어의 씨앗 - 마치 “처음에 말이 있었다”라고 하듯이 - 단어는, 언어의 역사 안에서, 언어의 본질 자체에 의해서 메시아적 종점에 이를 때까지 “성스러운 성장”(130)을 겪는다. 여기서 언어들이 감추고 있는 것, 즉 계시의 지금과의 그 거리를 알기 위해서, 얼마만큼 그것이 현재화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이 성스러운 성장을 시험하고 겪는 것은 다름 아닌 번역이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130 참조)
이렇게 번역은 이질적인 언어들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단지 임시적으로 그 거리를 측정할 뿐이다. 단번에 직접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간접적으로 그것은 가능할 뿐이다 : 종교들의 성장이, 언어의 영역에서, 최상의 언어에 감춰져 있는 씨앗을 성숙시켰듯이, 번역은, 비록 자신의 작품들이 영속하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지라도, 그의 작업이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언어의 단계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번역 안에서 원작은 말하자면 보다 순수하고 지고한 언어의 권역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고, 그 안에서 성장하고 고양된다. 이 권역은, 두 언어가 서로 화해하고 서로를 완성할 수 있는 약속의 땅인 동시에 접근이 금지된 땅이기도 하다.(131참조) 원작은 이 장소에 남김없이 도달하지 못하지만, 번역을 소통/전달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거기에 있다. 이것의 본질적인 핵(씨) wesenhafte Kern은 번역에서 다시 번역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질 수 없는 것이며, 이행/전이/Übertragung/transfert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언어와 그것이 간직한 내용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가 원작과 번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언어와 그것의 내용이 마치 열매와 껍질처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면, 번역의 언어는 마치 주름이 잡혀있는 널찍한 왕의 외투처럼 그것의 내용을 감싼다. 원작에서 이 둘은 마치 과일과 그것의 껍질처럼 꼭 달라붙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지만 번역에서는 그 둘의 관계는 왕의 외투가 상징하는 것처럼 서로 분리되어 강압적이고 낯선 어떤 것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번역의 언어는 자신 이상의 것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이 일치하지 않음, 이 결함은 번역의 허약성이 아니라, 최상의 번역의 상태를 지시한다. 이로서 번역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작을 더 이상 이행이 필요 없는, 다만 그 자리에서 원작을 다른 부분으로 상승시키는, 그런 궁극적인 영역으로 옮겨 심는 작업으로 드러난다.
이 영역은 우리가 찾는 진리 elle-même matériellement la vérité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왕의 신체는 주름이 잡혀있는 왕의 외투로 감싸져 있다. 이 비유는 위의 원작에서의 언어와 그 내용의 관계를 열매와 껍질의 자연적인 비유를 번역에서의 그 둘의 관계를 왕과 왕의 외투라는 인위적인 비유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왕의 외투가 번역의 다른 이름이라면, 이 외투가 감싸고 있는 왕은 원작일 것이다. 이 왕, 열매와 껍질의 통일체인 원작은 그 중심에 단단한 씨/핵/Kern(상징하는 것, 138)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단단한 씨는 번역의 왕국에서 번역되어질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자리에서 다만 언어의 궁극적인 영역으로 고양/상승되어질 뿐이라고 말해진다. 이 궁극적인 영역은 원작과 번역의 화해가 약속되어진 것으로 진리의 언어일 것인데, 그것은, 화해는 단단한 씨처럼 절대로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처음부터 만질 수 없는 것, 접근이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 접근 불가능성은 또 다른 비유, 접선의 비유를 통해서 다시 드러난다. (139참조) 원을 스쳐지나가는/flüchtif 선(탈주선)과의 접촉이 만드는 것은 한 점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의미라는 무한히 작은 점(139)에서 원작과 관계한다. 이 접촉은 마치 바람이 스쳐서 내는 하프의 소리처럼,(141) 무한 직선으로 외부로 무한히 뻗어가는 직선의 비유를 깨어진 단지의 조각 맞추기(136)의 비유로 연결시킨다. 무한히 작은 점, 바람, 깨어진 조각 등등의 비유는 다 무엇인가?
의미의 회복이, 그리고 그 소통이 더 이상 번역의 법칙의 토대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번역에서의 오래된 규칙 즉, 의미에 일치하는 (의미의) 회복의 자유와 이를 위해 단어들의 충실이라는 전통적인 충실과 자유의 개념은 달리 이해되어져야 한다. Wörtlichkeit/littéralité/글자와 텍스트의 엄격한 충실성은 더 이상 의미의 회복으로서의 충실로 이해하면 안 될 것이다. 흴더린의 소포클레스 번역이 보여주는 직역의 기괴함은 바로 이 ‘직역’에의 요구를 달리 해명한다. 여기서 번역은 부서진 단지의 조각들을 맞추는 작업에 비유된다. 이 조각들을 맞출 때, 번역자는 원작에 의미에 충실해서 이 조각들을 맞추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 le mode de visée을 자신의 언어 안으로 적용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결국 두 언어가 각각 더 큰 파편 혹은 조각의 부분 혹은 파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137참조) 여기서 번역자의 자유와 충실은 원작에의 단어의 충실과 의미의 회복의 자유가 아니라, 이 의미 뒤에 숨어 있는 ‘의도’, 전달 불가능한 보다 궁극적인 요소로서 순수언어를 원작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단어에의 충실과 원작의 의미에서 해방된 번역자의 자유가 자리한다. 이 의도는 상징하는 것과 언어의 생성 속에서 드러나는 상징된 것 안에서 감쳐져 있는 순수 언어의 핵 자체이다. 그런데 이 핵 자체는 만질 수 없는 것, 번역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 핵은 무한히 작은 점으로, 또는 바람에 스쳐 나는 하프의 소리처럼, 항상 가까이 오다가 곧이어 멀어져 가는 ‘탈주flüchtig’의 형태로 밖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 탈주로 인해 번역자는 모든 언어의 문들이 닫히고 그를 침묵에 가둘 수도 있는 그런 위험, 이것은 번역의 본래적인 위험인데, 언어의 바닥없는 심연으로 떨어질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이 무한 탈주 안에서도 ‘정지’가 있다. 이 정지는 의미가 언어와 계시의 흐름의 분수령이기를 그치는 성스러운 텍스트에서만 가능하다. 의미의 매개 없이, 언어의 글자 그대로의 글자성 Wörtlichkeit 안에서 진정한 언어로, 진리로 가르침으로 고양한다. 여기에는 글자 Wört/lettre만이, 기표signifiant만이 있다. 이것은 순수한 언어의 진리이며, 말라르메가 par une frappe unique, elle-même matériellement la vérité라고 말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une frappe unique라는 것은 무엇인가? 문자의 기입, 한번의 기입, 그 자체는 찍혀진 그대로, 어떤 의미의 소통도 없이, 대체할 수도 없이, 전이되어질 수도 없이 그 자체로, 써진 그대로, 그 물질성 그대로, 진리이다. 만일 이 물질성 안에 이미 모든 것이, 행간에, 글자와 글자 간에 이미 잠재적인 번역을 포함하고 있다면, 여기서 번역가의 이름은, 번역하는 주체의 이름은 어디에 적을 수 있는가? 라깡식으로 물으면, 분석가의 주체의 자리는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