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레비나스 : 아나키 an-archie로서의 주체성

aurorepark 2008. 8. 4. 21:41

이 글은 1975-1976년 솔본느에서 레비나스가 신 죽음 그리고 시간 Dieu, la mort et le temps"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의한 것을 자끄 롤랑 Jacques Rolland이 묶어서 1993년에 Grasset에서 출판한 책에서 1976년 2월 20일 금요일 (p. 201-205) 강의에 대한 번역이다. (여기 표시된 쪽 수는 문고판  bibilo essais의 것이다.)

이 글은 레비나스의 주체성의 개념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후기의 글 중의 하나로 아나키스트로서의 레비나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면모는 그의 초기 저서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에서 이미 다음의 질문의 형태로 드러난다 : "어떻게 한 존재자는 타자에 의해 자신이 완전히  지워지도록 내버려 둠이 없이/먹힘이 없이 타자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TA, puf, p.65.) 이 질문은 곧 이어서 레비나스 자신이 설명하듯이 "초월성 안에서 나 moi 의 보존의 문제 그 자체"와 겹친다. 이 질문을 잘 살펴보면 그의 철학적인 문제가 하이데거에 반대해서 나왔음을 안다면 이미 이 질문에 하이데거의  '내 맡김laisser être' '세계 le monde' 그리고 '죽음 la mort'에 대한 하이데거적인 개념에 대한 숨은 비판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말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음이란 존재론적으로 어떤 종류의 공통체에 - 그것이 존재와의 공속성을 말하든 아니든 간에 -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정치적으로 공동체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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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 : 아나키로서의 주체성

Emmanuel Lévinas : La subjectivité comme an-archie



1976년 2월 20일 금요일


1단락: 존재-신-학에 의존하지 않고 신에 접근하는 한 방식은 항상 그 지향의 대상을 가지며 자신의 관점에서 대상을 측정하는 그러한 지향성의 틀 안에 포섭되지 않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온다. 욕망, 탐구, 질문 또는 희망처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생각들 -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사유, 사유가 자신 안에 담기에는 너무 큰 것. 타인들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이 이와 같은 것일 것이다. 윤리가 자유에 대립되는 것처럼 지향성과도 양립한다. 왜냐하면 책임이 있다는 것은 모든 결정에 앞서 책임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지향성의 원초적인 행위의 실패가 있듯이 초월론적인 통각의 단일성의 회피/거부, 실패, 그리고 포기가 있다. 마치 여기에 시작 이전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 기원-이전 an-archie [1] 그리고 이것은 자발성으로서의 주체를 다시 문제 삼는다; 나는 나 자신에서 나의 기원이 아니며, 나는 내 안에 나의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혹자는 러시아 전래 동화의 나오는 심장을 자신 밖에 지닌 한 기사를 떠올릴 것이다[2].)


2단락: 이 타인에 대한 책임은 ‘다른 하나를-위한-하나 l'un-pour-l'autre’의 구조로 이룬다. 여기서 하나는 다른 하나의 인질이,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그 하나의 동일성 안에서의 다른 하나의 인질이 되기까지 확장된다. 무엇보다도 자기로의 회귀가 문제로 들어난다. 자기-자신을 통한 타자로의 접근  Pour l'autre en guise de soi-m̂̂eme, 타인을 대신 substituiton 할 수 있을 때까지. 바로 이것이 존재 안에서 알려질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본질의 예외에 해당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는 배가 고파 본 사람에게 타인에 대한 그의 배고픔에 대한 공감은 확실히 자연적인 감정이지만, 대신함이라는 사태에 직면하면, 세계와 존재 안에서 작동하던 메카니즘과의 연대가 단절된다. 세익스피어와 더불어 “헤큐브는 나에게 무엇인가?”라고 물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를 주제화하는 초월론적인 의식에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주체성을 기술하고 있다. 근접성 proximité은 이미지들로도 주제 thème로도 드러나지 않는 타인과의 관계로서 드러난다. 타인은 측정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인은 같은 척도에 의해서 재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하나의 주제 안에 잡을 수 없으며 의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얼굴이다. 그리고 강박관념이 생겨나는 얼굴의 비가시성처럼, 이 비가시성은 접근하는 것의 비의미성에서가 아니라, 발현 manifestation, 제시 monstration와는 다른, 결국 봄 vision과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데 있다.


4단락 :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 온 전통철학이 가르쳐 주는 것과 반대로, 의미작용은 반드시 주제화 thématisation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를-위한-하나’는 직관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이 관계에서 ‘위한 pour’ 이라는 말 안에서 말해지는 책임으로부터 나오는 '부가가치 le surplus'이다. 이 ‘위한’ 안에서 소여를 넘어서는 그리고 그 유명한 후설의 “의미부여 Sinngebung” 와는 구분되는 의미작용/의미 signification의 의미체 signifiance가 알려진다.


5단락 : 의미작용은 바로 ‘다른 하나를-위한-하나’ 또는 타인을 위한 책임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모든 것이 같아지는 지식의 비-공격적인/평화적인  관계가 아니라, 나를 요구하는 타인의 부름이며, 심지어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이 극단적인 위급함에 의한 부름은 모든 참여 이전에 모든 시작 이전에 일어난다: 아나크로니즘 anachronisme. 우리는 강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어떤 행위에 앞선 관계, 행위도 정립도 아닌 관계 - 그것은 의식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해 정립되기를 원했던 피히테에 주장과 정확히 상반되는 것이다.


6단락 : 여기서 상황은 그와는 다르다 : 의식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해 정립되는 것은 아니다. 강박은 일상의 흐름과 역으로 의식을 가로 지른다. 그리고 기원보다 훨씬 먼저 일어나면서, 기원과 시작에 앞서서, 모든 것에 앞서 의식의 행로를 스스로 산출하면서 강박은 의식 안에 마치 이방인처럼 자리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다시 회복하는 존재론의 유희를 멈추게 하는 아나키이다. 이 근접성 안에서, 자아는 le moi 비-기원적인 방식으로 인해 자신의 현재에 늦게 도달하며, 이 늦음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아나키는 그런 의미에서 '박해'이다; 이것은 말없이 나를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나에 대한 타자의 전적인 지배의 방식이다. 


7단락 : 이 박해는 광적인 의식의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영향을 받는 형식을 지시한다. 이것은 의식의 역전을 말한다. 즉 지향성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 수동성, 그리고 따름이 항상 감당함이 되는 그런 수동성을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자유인 의식 안에서, 그것도 의식의 종착지인 그 자유의 의식 안에서 (왜냐하면 자유 안에서 모든 것이 지향적으로 감당되기 때문이다) 수난으로서의 자기희생이 가능한가? 광기 강박이 어떻게 의식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의식이 엮는 '극'의 파라독스이다.


8단락 :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이질성은 - 객관적이지도 공간적이지도 않은 외재성 (공간적인 것은 여전히 의식에 의해 회복되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비-주제적으로 무정부적으로 - 극 또는 자아가 자기 방어를 하는 변명론적인 재 파악이 이뤄지는 로고스, 말, 이성을 해체하는 무정부주의의 상위-존재론적 méta-ontologique 드라마를 지시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적어도 세 측면에서 극단적인 수난이 문제가 된다. 수난에 의해 의식은 의식임에도 불구하고 사라진다. 수난 안에서 의식은 어떤 선험성도 없이 파악된다. 타인은 항상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타인이다. 수난과 더불어 의식은 욕구하고 싶지 않은 것 le non-désirable에 의해 상처받는다. (타인은 욕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방인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함해서! 타인과의 관계에는 어떤 리비도도 없다. 수난은 비-성적인 것 그 자체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모든 질문에 앞선 고발이 있다.


9단락 : 책임 없는 자유, 순수한 유희로서의 자유를 요구하는 하이데거나 핑크, 또는 잔느 델옴므의 관점과 달리, 우리는 어떤 연루에도 관계하지 않은 책임을 말한다. 그리고 자유의 존재 안으로의 기입은 어떤 결단 없이 일어난다. (이럴 경우, 타자는 억압되고 - 나, 나는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여기에 자유/비-자유라는 쌍 이전에 현재 자기가 시작하지 않은 잘못과 불행으로부터 손을 씻는 그리고 대자로만 존재하는 자의 이기적이고 제한된 구도를 넘어서 가는 부름이 정착한다. 현재 했던 적인 없는 과거와의 관계, 대자가 아닌 한 존재자의 부여. 여기에 그의 탈-존재사건이 자리한다 (존재는 단지 존재일 뿐만 아니라, 존재함, 다시 말해 자기 아닌 다른 것을 자신을 위해 자신 안으로 끌어들임 또는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이다.)


10단락 : 모든 것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이 끝없는 사건, 주체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자기의 수난 안에 예외적인 단독성/유일성 unicité이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신의 존재를 비우는, 자신을 뒤집어 놓는 그런 존재자의 주체성은 '존재와 다르게autrement qu'être'이다. 존재와 다르게, 그것은 탈-존재사건이며, 타자의 비참을 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가 나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책임까지 짊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단순한 교환도 인간들 사이의 교환도 없다. 자기임은 - 인질의 조건 또는 비조건 - 이것은 항상 그 이상의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가장 강한 의미에서의 인질적인 책임. 왜냐하면 타인이 나를 고려한다는 것은 나에게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헤큐브는 무엇인가? - 다시 말해, 나는 나의 형제의 보호자인가? - 이런 질문들은 존재 안에서는 이해 불가능하다.


11단락 : 대문자 나 Moi의 전-역사 pré-historire에서, 소문자 나 는 그 심층에서 혹은 그 정상에서 타자의 인질이다 - 자아보다 더 오래 된, 자기에 있어 존재 안에서 존재가 문제 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나의 종교성 re-ligiosité, 다시 말해,  전-기원적으로 타인에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용서와 자비 또는 공감이 있을 수 있게 하는 인질의 비조건일 뿐이다. 이 글을 끝내기 위해 폴 슬랑 Paul Celan의 시를 불러오겠다 : 내가 나일 때 나는 너이다. Ich bin du, wenn ich ich bin.



[1] An-archie, 이 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선 기원 άρχή과 독립적인 것으로 - 존재와 다르게 Autrement qu'̂̂etre 에서 레비나스가 '전-기원적 pré-originel'이라고 부르는 것. 다른 한편 국가의 전능한 권력에 저항하는 아나키 또는 아나키즘이라는 보다 명백하고 일반적인 의미로도 읽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선지주의prophétisme가 던지는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2] 이 전래동화는 제목은 『단코의 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