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밖에서

레비나스에서 이미지의 현상학, 주체의 방식(6)

aurorepark 2014. 7. 30. 23:25

<6> “삶의 내면에서 아니 차라리 조상의 죽음 안에서, 순간은 무한히 지속한다: 라오콘은 영원히 뱀들에 목이 졸려 있을 것이며, 자콩드는 영원히 미소질 것이다. 라오콘의 뻗친 근육에서 알려져 오는 미래는 영원히 절대로 현재화 되지 않을 것이다. 자콩드의 영원한 미소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고 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정지된 절대로 오지 않을 미래로서 미래는 고정된 조각상 주변에서 부유한다.”(IH,138)

 

 

이제 이미지가 존재의 그림자라는 것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이 물질성 그 자체”(137)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이미지의 물질성은 레비나스에서 베르그손과 달리 아주 특수한 시간의 정지로 드러난다. 마치 시간의 연속성에 시간의 단절을 가져오기 위해 시간성 안에 공간을 여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앞서 우리는 실재가 자신의 고유한 얼굴face 위에 동반하는 풍자, 알레고리로서의 이미지에 대해서, 또 존재 안에 존재가 자신의 본질과 일치하지 못하고, 자신을 드러내면서 배반하는trahir 둘 사이의 균열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고전 예술이라고 하는 것, 완전한 미의 실현은 어떠한가? 거기에도 풍자성이 있는가? 차라리 고전 예술은 바로 이 풍자성을 감추는데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자신의 풍자성을 감출 수 있는가? 가장 완벽한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극복할 수 없는 풍자성은 아마도 우상안에서 드러날 것이다. 우상으로서의 이미지는 바로 자신의 비실재성의 존재론적 의미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존재의 작업oeuvre 그 자체는 존재하는 척함semblant d'exister에 의해서 이중화된다.”(138)

레비나스를 따라서 우리가 이미지를 우상으로 이해하자마자, 이미지는 조형적으로 드러나며, 모든 예술 작품은 결국 시간의 자기 자신에의 늦음”(136)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정지, 이 늦음은 무엇인가?

조각은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미래 없이 지속하는 순간의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서 미래의 임박은 모든 현재의 특징인 사라짐의 특징을 상실한 채 순간 앞에서 지속한다. 사라짐이 없는, 현재가 자신의 일을 수행하지 않는 그런 부동의 현재, 순간은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순간”(139)과 다르지 않다.

미래를 가져올 수 없는 이런 현재는 오래전부터 운명이라고 불리던 것이다. 이 운명이 비극인 이유는 예술 안에는 자유로운 존재 안의 이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상 안에서 자유의 힘은 그것의 무능 안에 고정된다.”(140) 그런데 인간이 예술 작품을 산출할 수 있는 그 사실로부터 우리는 마치 삶의 도약을 이중화하는 죽음”(142)처럼, “지속 한 가운데 석화처럼우리에게 익숙한 지속의 연속성에 의심을 던진다. 이때 우리는 예술의 한정된 문제를 벗어나서 죽어감mourir 안에서(아고니) 예술과 같은 운명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죽어감의 시간 그 자체, 죽음의 순간은 스스로 죽음에 이를 수 없다. 죽음의 순간 안에서 미래의 지평은 주어지나, 새로운 현재의 약속으로서 미래는 영원히 거부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고 나면, 그것은 이미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나의 죽음이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인 나의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에드가 포우의 이름을 인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사이의 시간혹은 죽은 시간(le temps mort)’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닌 현전의 현상학의 불가능성, 현상학적인 시간론의 불가능성, 자기 현전의 불가능성에 이외에 다름 아니다. 이때 우리는 마치 죽음이 충분히 죽음이 아닌 것처럼, 마치 살아있는 자들의 지속에 평행해서 사이의 영원한 지속이 달리는 것처럼”, 사이의 시간entretemps”은 지속한다.

개념의 영원성과는 다른 이 사이의 영원한 지속은 비인간적이고 괴물 같은 어떤 것”(143)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